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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근초고왕, 예왕지인을 가진 고흥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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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주말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조나라의 대장군 기를 먼저 차지하는 쪽이 진평이성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로 약조한 부여구(감우성 분)와 위비랑(정웅인 분)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는 복구검이 대장군 기를 취하는 순간에 위비랑의 책사인 아지카이의 계략으로 대장군 기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실을 말하지 않은 복구검으로 인해 부여구는 대장군 기를 모닥불에 던져버리며 이번 승부를 포기하지만 위비랑 또한  복구검을 해한 화살이 동명단사의 화살임을 모두가 알게 된 마당에 대장군 기를 두고 벌인 싸움의 결과에 난처해하는데요.

 한편, 뜻밖에 고흥(안석환 분)이 진평이성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아지카이는 위비랑에게 진평이성의 진정한 주인은 동명왕의 신물인 예왕지인을 얻는 자라며 위비랑에게 고하게 되고 앞으로 고흥의 예왕지인을 둘러싼 긴박한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였습니다.


 사실 고흥에 대한 얘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알 수 없고 토착인으로서 한화(漢化)하여 고씨(高氏)를 칭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중국적인 성씨를 가진 것으로 미루어 백제에 귀화한 중국인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고흥(高興)은 동부여의 학자로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근초고왕의 마지막기록에 잠깐 등장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근초고왕 30년(AD 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서의 고흥(高興)은 백제의 박사로서 '서기 (書記)'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백제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졌습니다.

 근초고왕 때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 (書記)'를 편찬한 것으로 짐작건대, 당시 백제는 초고왕(肖古王)계 중심으로 한 왕위계승이 안정화되고, 정복활동을 통한 영역 확대와 이로 인한 왕권확립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었을 거라 판단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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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 [시청각 교육/컨텐츠속 역사이야기] - 근초고왕, 알고 보면 200%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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