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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이산]정조와 규장각 그리고 그들! - 규장각 사검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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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왕이 쓰던 물건이나 글씨)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조 때부터 세를 키워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와 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또한,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 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규장각은 정조가 구상하던 개혁정치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는 거대해졌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론세력이 궐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터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이던 규장각에 자신만의 세력을 배치하기엔 그가 처해있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없애기 위해 정조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는데 바로 서얼들을 중용하는 서얼허통(庶孼許通)정책이었습니다.

 개국 이래로 학식과 능력에 관계없이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세의 길이 막혀 있던 그들에게 정조가 베풀어준 새로운 세상은 그동안 꿈꾸었던 그들의 이상을 학문에 접목시켜 명실 공히 조선시대 최고의 지식 르네상스를 도래하게 하는데요. 이들 중 훗날 '규장각 사검서'라 불리며 당시의 지식계를 단숨에 평정해버린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서이수(徐理修)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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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朴齊家)
  시와 글씨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으나 서얼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친분을 쌓아오던 이덕무와 함께 유명한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있으며 홍대용, 유득공 등과 친분을 맺고 북학(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에 심취하게 됩니다.

  27살에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정책으로 규장각에 들어오게 된 그는 뛰어난 학문적 역량으로 그의 벗 이덕무와 함께(사실 이덕무와는 아홉 살이나 아래) 정조의 총애를 받아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은사 행렬에 합류하여 꿈에도 바라던 북경에 가게 됩니다. 3개월에 걸친 대장정 동안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북학의(北學議)'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남기게 되죠.

  규장각 검서관으로 정조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그는 신분 차별을 없애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밤을 새워 연구에 증진한 탓에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그는 자진하여 규장각 검서관에서 물러나는데 정조는 백성을 보살피라며 부여 현감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하지만, 출신성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암행어사의 이간질에 결국 파직을 당하게 되는데요. 문관의 길이 막히자 무관 별시에 응시해 합격할 정도로 무예에도 능했던 그는 정조 승하 후 그의 사돈이 시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흉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아무런 물증도 없이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고 맙니다.

1년 뒤 사면되었으나 당시 고문의 여파로 얼마 있지 못해 세상을 떠나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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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무(李德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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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17년 정종 임금의 후손인 아버지 이성호와 어머니 반남 박씨사이 장남으로 태어난 이덕무는 아버지가 서얼 출신으로 그 또한 신분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병약하기까지 해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을 수 없었던 그였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6세 때 글의 이치을 깨쳤으며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명성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에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된 후 십여 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많은 국내 학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진귀한 서적들을 마음껏 탐닉합니다.

스스로 간서치,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렀을 정도로 책을 사랑했던 이덕무는 서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힘을 바탕으로 신분을 넘어서는 시대의 변혁을 꾀하였던 실학자로 살다 53세의 나이로 타계하고 맙니다.


☞ 유득공(柳得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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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25년에 태어난 그는 출생 직전 전염병으로 여덟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사망하는 불행을 먼저 겪습니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이었던 그는 18,19세에 숙부의 영향을 받아 시를 배웠으며, 20세를 넘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규장각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그는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사검서로 명성을 떨치며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는데 이중 유명한 것이 바로 '발해고(渤海考)'라는 역사서입니다.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아 그 실체를 잃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조선의 역사책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사서들을 종합하여 발해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 고토(故土)가 우리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의미가 높은 조선 유일의 발해와 관련된 대단한 걸작이었습니다.
위와 같은 그의 역사관은 나중에 정약용의 위대한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십여 년의 규장각생활에 돋보기 없인 글을 읽지 못하게 된 그에게 정조는 실무에서 물러나게 한 후 박제가와 함께 종신 규장각 검서로 임명되는 특전을 얻게 되지만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의 보복 후폭풍에 결국 파직을 당하고 맙니다.

  이후 순조 7년 사망할 때까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글에서 농부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한 것으로 역사는 유추하고 있습니다.


☞ 서이수(徐理修)
  영조 25년에 태어난 그는 서얼 출신이지만 학문이 뛰어나 박제가,이덕무,유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규장각 사검서로 명성을 떨친것 외에 그에 관한 얘기는 앞선 세 사람보다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네요.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지방관직을 겸임하게 하였으니 그 또한 뒤에 용인·포천·토산 등의 군수를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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