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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영화

역적, 소설 아닌 실존인물 홍길동의 아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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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의적 홍길동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드라마 방영후 많은 시청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의 이야기와 너무나 달랐던 것인데요.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연산군 집권하던 때고, 그가 양반의 서얼이 아닌 노비의 아들로 등장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던 허균의 '홍길동전'과 180도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는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이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등장하는 실존인물 홍길동을 소재로 드라마로 만들었기 떄문입니다.


역사속에 홍길동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500년 입니다.

* 1500년 10월 22일 (연산 6년)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 6년 10월에 강도 홍길동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으로 당시 홍길동은 충청도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 체포가 됩니다.




홍길동의 죄명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의금부에서 길동의 사건을 보고한 걸로 보아서 중대한 죄를 지었음에는 분명해 보이는데요.

* 1500년 12월 29일 (연산 6년)


의금부의 위관(委官) 한치형(韓致亨)이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옥정자(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와 홍대(겉옷에 두르는 붉은색의 띠)의 관복차림으로 첨지(정3품, 당상관)행세를 하며 대낮에도 무리지어 관가를 다니며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나 권농과 이정 (오늘날 면장,이장)이 묵인한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어 허균이 이를 참고하여 홍길동의 활약상을 전개하지 않았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 홍길동보다 이사건으로 더 많이 이름이 거론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엄귀손'이라는 인물인데요.


 역적을 계속보신 분이라면 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극중에서 길동과 길동의 아비 아모개의 조력자 '엄자치(김병옥 분)'입니다.

* 1500년 10월 28일 (연산 6년)


의금부가 아뢰기를, 


"엄귀손(嚴貴孫)은 죄가 마땅히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유배(流配)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회수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정승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이 의논드리기를, 


"포악하고 독한 무리끼리 작당하여 백성들에게 큰 해독을 끼쳤으니, 이같은 도적들은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었다면 의당 고발하여 체포해야 할 것인데, 엄귀손이 홍길동(洪吉同)의 행동 거지가 황당(荒唐)한 줄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고 또한 따라서 산업(産業)까지 경영하여 주었으니, 법으로도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법과 합합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이 비록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아 먹었지만 이것은 인정(人情)에 보통 있는 일이니 그다지 허물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국문(鞫問)을 당하여도 승복(承服)하지 않았다고 해서 졸급하게 율문(律文)의 ‘실정의 알고도 죄인을 숨겨준 조문’을 적용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고, 한치형(韓致亨)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본래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선왕(先王) 때에 포도장(捕盜將) 이양생(李陽生)이 엄귀손의 홍천(洪川) 본가(本家)에 가서 황당(荒唐)한 물색(物色)을 수색해 냈으나 그 때 겨우 면했었는데, 지금 또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았고, 또 일찍이 주선하여 가옥을 사주었으니 홍길동의 범한 짓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형벌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 내어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성준(成俊)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범죄와 율이 서로 꼭 맞습니다."


하며, 이극균(李克均)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이 다만 홍길동의 행동 거지가 횡당(荒唐)한 것을 알면서도 주선하여 감추어 주었다면 적용한 법이 너무도 적당하겠지마는 만약 홍길동이 장물(贓物)을 기탁(寄託)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법을 적용할 수 없으니, 홍길동의 문초 끝나기를 기다려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한치형의 의논대로 하였다



* 1500년 11월 6일 (연산 6년)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엄귀손(嚴貴孫)은 본래부터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일찍이 동래 현령(東萊縣令)이 되어서는 관물(官物)을 도취(盜取)한 일로 죄를 받아 파면되었고, 또 평안도 우후(虞候)가 되어서는 또한 공물(公物)을 함부로 훔친 일로 파출(罷黜)되어, 그가 탐심 많고 비루한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또한 일찍이 양인(良人)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아름다우면 첩으로 삼고 아름답지 않으면 종의 아내를 삼게 하여, 이 때문에 양인(良人)을 잡아다가 천인(賤人)을 만든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또한 본래는 노복(奴僕)과 재산이 없었는데 지금은 서울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4천 석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부요(富饒)하게 된 것이 지극히 황당(荒唐)하오니 청컨대 강도(强盜)와 서로 통한 죄를 끝까지 국문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역사에서 홍길동이 체포된 후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만 홍길동의 당시 활약(?)상이 얼마나 상당한 풍파를 일으켰는지는 아래 기사를 보면 짐작이 가능한데요.
* 1513년 8월 29일 (중종 8년)

호조가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이 잇따라, 양전(量田)297) 할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도 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대저 양전하는 일은 1∼2년 동안에 해낼 수는 없습니다. 경기는 인가를 철거한 【폐조 때 인가를 철거하였다.】 뒤로 절호(絶戶)298) 가 매우 많고, 충청도는 홍길동(洪吉同)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流亡)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稅)를 거두기가 실로 어려우니, 금년에 먼저 이 두 도의 전지(田地)를 측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양전은 중대한 일이라 본디 해야 하나, 어찌 폐단되는 일이 없겠는가!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홍길동의 활동했던 충청도 일대에 그 땅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세를 거두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올해는 반드시 토지 측량을 해야한다는 내용으로 길동이 조선에서 사라진지 십수년이 흘렀음에도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상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연산군 시절 '능상(아랫사람을 윗사람을 업신 여김) 척결'의 광풍이 불면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한과 한풀이를 당시 실존인물 홍길동 앞세워 사이다같은 위로를 전해주기 위한 의도로 기획된 드라마로 '홍길동' 그가 실존 인물이기에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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