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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술 때문에 생을 마감한 세종의 동반자 윤회(尹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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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론에 앞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거위와 구슬"이라는 설화를 소개합니다.

 젊은 시절 한 나그네가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행색이 말이 아닌 까닭에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아래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버렸는데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뜰에 앉아있던 나그네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는데 나그네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왜 어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나그네가 대답하길

  “만약 내가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가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 아니오? 그래서 거위가 죽을까 염려되어 온갖 욕된 것을 참고 아침까지 기다린 것이오.”


  이 나그네가 바로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맹사성, 정인지 등과 더불어 세종의 가장 총애를 받았던 윤회(尹淮)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10세 때 이미 통감강목(通鑑綱目-송나라 주희(朱熹) 가 BC403-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 역사를 쓴 책)을 읽었고 태종1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로 이조정랑, 춘추관기사관등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빈객(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이품 벼슬)으로 있었습니다.

  훗날 맹사성 등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의 학문과 문장은 당대 최고라고까지 불렸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것이 흠이었었는데 술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세종이 베푼 연회에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신이나 술을 마셨는데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연회가 끝날 무렵엔 고주망태가 되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나가고 다음날 세종 앞에 불려가 앞으로 석 잔 이상의 술은 절대로 마시지 말 것과 이를 어기면 벌로 다스린다는 어명을 받는데요. 세종이 이처럼 명한 것은 그만큼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윤회는 그렇게 좋아하는 술이지만 석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못가 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가 생각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었는데 어명을 어기지 않으면서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방법은 조그만 술잔 대신 지름이 한자나 되는 놋버러기를 잔으로 삼은 것입니다. 놋버러기도 잔은 잔인지라 어명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1422년(세종 4) 부제학이 되었고, 그뒤 동지우군총제·동지경연사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고 대제학까지 맡으면서 국가적인 편찬사업에 여러 번 참여하였습니다. 1423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관(柳觀)·변계량(卞季良) 등과 함께 〈고려사〉를 고쳐 편찬하는 데 참가했으며, 1432년에는 동지춘추관사로서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 등과 함께 〈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습니다. 이어 중추원사 겸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자치통감훈의》를 찬집하고,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던 윤회(尹淮)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상왕 태종과 세종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는데 공이 컸으며 세종대왕과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다합니다.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던 그는 1436년(세종 18년) 56세를 일기로 술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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