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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이산]정약용에게 내린 숙제! 정조가 한강을 건너야 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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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경모궁, 묘(墓)를 영우원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고 정조 9년(1785) 능행(陵幸 : 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단행하는데요.

  정조의 능행(陵幸)은 단순한 효(孝)의 의미가 아닌 능행을 통해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또한, 능행이란 형식을 통해 상공업 발달로 사회 변동이 활발하던 수도권을 직접 방문, 사대부와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정조는 조선시대 다른 국왕들에 비해 능행차가 특별히 많았는데 그가 재위기간 24년동안 도성을 벗어나 경기도에 흩어져 있던 왕릉을 방문한 횟수는 모두 66회나 되었습니다. 정조는 태조, 숙종, 영조 등의 왕릉 외에 전체 능행 횟수의 절반에 육박하는 31회에 걸쳐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영우원과 현륭원 등을 방문한 것은 당파싸움 와중에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고 자신의 혈통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문제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이곳에 가기위해서는 한강을 도하해야만 하는 최대 난관이 있었는데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산]에서 처럼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 방법을 강구하라 지시를 내리게 되는 것이죠. 다들 아시겠지만 정약용은 놀랍게도 부교(浮橋:배다리)를 생각해내는데요.

 드디어 정조 9년(1785)궁을 나와 노량진 한강에 목선으로 부교를 만들고 그 위를 어가 행렬이 통과하였으니 그 당시의 가교 만드는 공병 기술과 어가 행차의 위용은 아래 그림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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