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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이산]문효세자를 잃은 정조의 슬픔은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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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빈성씨에 관한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산]에서도 결국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는군요. 정비인 효의왕후 이래 두 명의 후궁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던 정조가 그의 정인 의빈성씨에게서 나온 문효세자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는 [이산]에서도 잘 묘사되었는데요.

과연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은 정조의 슬픔은 어느 정도였는지 실록을 통해 알려드립니다.

☞ 정조 10년(1786) 윤7월 19일(경인) - 문효 세자를 장사지내다.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餞別)하였다. 다시 홍화문 안의 악차(幄次)로 돌아와서 영여(靈輿)가 도성 밖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흑립(黑笠)과 백포 첩리(白布帖裏)를 다시 입고 묘소에 나가 최복(衰服)으로 바꾸어 입고서 일을 지켜보았다. 장사가 끝나자, 임금이 친히 신주(神主)를 쓰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지냈다.


 ☞ 용어 해설

* 전별(餞別) -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 악차(幄次) - 상중에 상제가 시묘(侍墓)하면서 삼 년 동안 거처하는 무덤 옆의 뜸집.
* 영여(靈輿) -영혼(靈)을 모시는 가마(輿)라는 뜻.
* 흑립(黑笠) - 검은 갓.
* 백포 첩리(白布帖裏) - 흰 무명으로 된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의 복장.
* 최복(衰服) - 상복
* 신주(神主) - 죽은 사람의 위패.
* 초우제(初虞祭) - 장사를 지낸 뒤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로 장사 당일을 넘기지 않는다.

 그토록 귀히 여겼던 아들의 죽음을 손수 배웅하는 정조의 모습은 필시 군왕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이지 않았을까요?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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