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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과학자가 뽑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는 장영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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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영실은 발명가 또는 과학자이기보다 뛰어난 금속 전문가였습니다. 세종과 다른 과학자들이 설계한 기구들이 장영실의 뛰어난 손재주와 금속에 대한 지식으로 탄생하였으며 노비신분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는 극적인 삶도 후세에 귀감이 되기에 수많은 위인전으로 재해석되어 알려졌으므로 일반인들은 장영실을 조선 최고의 과학자라 알고 있는듯합니다.

 하지만, 실제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른듯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이천과 이순지를 꼽는데요. 조선 최고의 과학자 이천과 이순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천(蕆,)

  이천은 장영실과함께 조선시대 과학 중흥기를 지휘했던 인물입니다.

노비출신의 장영실과는 달리 권문세가의 자손이나 고려말 그의 외가인 염씨가문이 비리에 연루되어 최영과 이성계에게 모두 도륙당할 때 그와 동생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무예에 뛰어났던 그는 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재능을 인정받아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천재적인 과학적 자질을 겸비하여 병마절도사 시절 세종의 눈에 띄어 공조참판(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에 임명되어 금속활자를 만드는 국가적 대업을 훌륭히 수행하였구요. 특히 천문학 부문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는데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쳔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이 모두 그의 지휘를 거쳐 탄생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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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무관을 겸임하여 최윤덕과 함께 압록강 부근의 4군을 개척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한 그는 장영실과 출신성분이 달랐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는데요. 이천이 없었다면 장영실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영실이 이루어낸 거의 모든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았던 인물로 세종의 업적 중 특히 과학기술분야가 후세에게 큰 귀감이 된것에는 이천의 뛰어난 과학적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 천문학과 수학의 최고봉! 이순지(李純之)

  세종은 과학의 기초로 수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수학 교과서는 <산학계몽>으로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것으로 어려운 편이었고요.

또한,  세종은 중국의 양휘가 발행한 수학서 <양휘산법>을 나라에서 인쇄하게 했는데 세종이 얼마나 수학 애호가였나 하면 세종15년에 경상도의 감사가 <양휘산법> 100권을 인쇄해서 세종대왕께 바쳤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양휘산법>은 전문 수학서라기보다는 계몽서로서 송대의 수학을 집대성하고 명대에 정착된 민간 수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세종 때는 천문학도 크게 발전했는데 이 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학문이 수학이었으며 세종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바로 이순지(李純之, 1406~1465) 였습니다.

1406년 아버지 이맹상과 어머니 문화 유씨 사이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이순지는 5세 까지 누워서 지낼 정도로 허약했으며 말도 서툴렀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22세 때 과거에 합격해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에 근무했는데 그때 세종에게 산법을 공부 할 것을 권유 받았다합니다. 당시 천문, 기상, 역법, 측량의 발달에 맞춰 수학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죠.

1430년 세종은 이순지에게 한양의 북위를 물었는데 이순지는 38도 남짓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의심하였지만 얼마 뒤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 책에서 당시엔 원 둘레를 365.25로 보았으므로 그 값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게되는데요. 이때부터 세종은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1432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높이 8m나 되는 '간의대'라는 천문관측대를 세워 매일밤 5명의 천문관이 천문을 관찰했는데 이순지는 이 관측의 책임자였으며 그 이전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지는 이때부터 천문학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천문, 역법을 책임지던 서운관 최고책임자가 되면서 그는 장영실 등과 함께 간의, 규표,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업적은 <칠정산>의 완성이었는데요. 1444년 세종은 이순지에게 조선을 표준으로 실측한 역서를 쓰도록 하였고 이렇게 해서 백성들을 위한 달력 <칠정산>이 만들어 졌습니다. <칠정산>이란 칠정 즉 해, 달,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의 운동을 계산하는 기술로 내편은 중국의 전통적 계산법을 우리나라에 맞게 수정 한 것이며 이순지는 그 외편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라비아의 천문계산법을 우리에 맞게 고쳐 놓은 외편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운동의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일본에서는 240년 뒤에야 칠정산의 영향을 받은 “정향력”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천문학 이론을 소개한 <천문유초> 풍수지리에 관한 <기정동보>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천문유초>는 천문학 교제로 거의 유일하게 조선시대 천문학 공부의 기본 참고서가 되었습니다.

1436년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당시에는 부모상을 당하면 3년 동안 관직에 나갈 수 없었는데 세종은 이순지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믿을 만한 관측자를 놓칠까 몹시 당황해 하며 복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유난히 효성이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효도를 할 수 있도록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그를 호군으로 높여 주면서 다시 근무하도록 하였으니 세종이 조선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인 이순지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사학자들은 세계 수준의 천문 이론을 독자적으로 만든 이순지나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천이 자격루와 옥루 제작만 책임졌던 장영실보다 업적 면에서 더 훌륭한 과학자라고 말하기를 망설이지 않습니다.

아쉬운 건 드라마에서 이천의 모습은 등장하지만, 이순지는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영실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날갯짓을 시작하는 현시점에 이순지의 등장도 기대해봅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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