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경녕군은 정말 역심을 품었을까?



 태종은 총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경녕군은 제1서자로  어머니는 효빈 김씨였습니다.

효빈 김씨는 김점(金漸)의 딸로 원래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시비였으나, 뛰어난 미모로 태종에 총애를 받아 상전인 신덕왕후 강씨를 배신하고 태종의 후궁이 되어 태종이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개성의 정안군 방원의 사저)에 있을 때 경녕군을 낳았고, 그 공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01년 빈에 봉해졌습니다.

신덕왕후 강씨가 그녀를 이성계앞에 내놓기를 꺼렸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로 태종의 후궁이 된 효빈은 원경왕후의 견제 속에서도 태종의 총애를 이용해 아들 경녕군을 세종과 더불어 소위 대권주자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인재로 키워냅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왕위를 두고 벌어진 대결구도에 서자인 경녕군이 본인이 야심으로든 효빈의 치맛바람에서든 참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자의 지위가 계속 흔들리던 당시 상황 속에서 티끌만큼의 기대조차 품지 않았다면 이것 또한 이상할 것입니다.

[경녕군]


사실 세종은 이복 형인 경녕군을 아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대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던 경녕군은 양녕,효령대군과 같이 수학하였으며 충녕대군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니 학문적 역량 또한 뛰어난 인재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419년(세종 1) 8월 상왕인 태종의 사은사로 경녕군이 발탁되었을때의 일화입니다.

 중국 사신 황엄이 “성상의 조선을 대우하심이 오늘같이 후하신 적이 없었으니 친 왕자가 아니면 보내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정비의 소생은 아니더라도 역시 친 왕자일 것입니다.”하니 상왕이 “경녕군 이비를 보내겠소.”하였다. 1419년 12월 7일. 사은사로 중국 북경에 갔던 경녕군 이비가 돌아왔다.

“…황제가 비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예부에 명하여 전에 세자 이제(양녕대군)가 조현할 때의 예에 의하여 접대하게 하였다. 하루는 비를 전(殿) 위에 오르게 하고 황제가 어좌에서 내려와 비가 꿇어앉은 곳까지 와서 한 손으로 모자를 벗기고 한 손으로 상투를 어루만지면서, ‘너의 아버지와 너의 형(동생의 착오인 듯)이 모두 왕이고 너는 걱정 없는 처지에 있으니, 평소에 힘쓰는 바가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학문을 공부하든가, 활쏘기를 공부하든가, 자중하고 근신하면서 글을 읽을 것이다.’ 하고 … 별나게 총애하였다.” 

 이렇듯 태종과 세종, 심지어는 중국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경녕군은 태종의 국상 기간에 저지른 기생 일점홍과의 불륜조차 용서받을 수 있었고 세종대왕이 승하할 때 “후일 경녕군의 묘소는 왕릉에 못지않게 예우를 갖추어 드리라.”는 유지를 남길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합니다.

[대왕세종]에서 처럼 조말생의 계략으로 역심을 품으려 하는 경녕군에 관한 설정은 세종과 조말생의 대결구도에 의한 극적 상상력에 불과하다 판단되며 드라마 초반 세자경합에서 보여준 효빈과 경녕군에 대한 설정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충분이 가능한 역심이 아닌 야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녕군이 죽은 해인 1458년의 일을 기록한 <세조실록> 세조 4년 9월 9일자 기사에서 그의 시호인 제간(齊簡)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시호를 제간이라 하였다. 마음을 다잡아(執心) 씩씩함을 자제하는 것을 제(齊)라 하고, 공경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여기서 "마음을 다잡아(執心) 씩씩함을 자제하는 것을 제(齊)라" 한것은 아마 왕의 기질과 학문적 능력을 겸비하여 한 번쯤은 야심을 불태웠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자신을 잘 억제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어떤오후>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