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나라]대소는 정말 고구려를 위협할 정도로 강했는가?

반응형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자 천제의 아들(天子)로 어느 날 강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유인하여 주몽을 갖게 한 후 사라집니다. 유화를 강제로 취한 해모수는 이때 이미 늙은 몸으로 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금와는 해부루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딸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하백은 유화를 쫓아버리는데요. 쫓겨난 유화는 아이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찾아 부여로 향하는 도중 위험한 지경에서 뜻밖에 금와를 만나 동부여로 가서 자신의 손자뻘 되는 금와의 보살핌을 받게 되고 여기서 낳은 아들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입니다.

 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쏘기에 능했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주몽"이라는 이름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하죠. 이런 주몽의 능력은 금와의 아들들에겐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태자인 대소는 주몽을 몹시 싫어하여 그를 죽이려 모함을 꾀합니다만 이사실을 알게 된 유화가 주몽에게 부여를 떠날 것을 미리 알려주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MBC 주몽"에서처럼 주몽은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갑니다. 여기서 고구려를 세우게 되죠. 이후 얘기는 다들 아실 테니까 생략합니다.

☞ 대소의 동부여는 정말 고구려에 위협적이었나?

 고구려는 당시 졸본의 소도시국가였던 구려를 주몽이 구려의 대표귀족인 소서노와 혼인하여 건국한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왕이 된 후 차츰 친위세력을 형성했고 부여에서 친아들인 유리가 돌아오자 고구려 조정은 친왕파와 소서노파로 양분되어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 소서노파가 밀려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대리고 남하하는데 이때 졸본의 많은 귀족과 백성, 군사가 같이 이주했으니 일순간에 고구려의 국력이 축소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는 유리가 왕이 되면서 되면서 더 극심해졌습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소서노의 세력과 주몽이 죽은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던 개국공신들로 말미암아 더는 졸본에서 왕권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유리는 국내성으로 천도를 감행합니다.

 천도를 감행한 또 하나의 이유는 졸본과 동부여가 지리상으로 가까운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부여는 그 영토만도 이천리를 넘었다하니 이는 고구려의 배가 되는 수치이며 고구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기반을 확고히한 동부여의 군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합니다.

 유리왕이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할 때를 전후로 동부여의 왕이 된 대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유리왕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곧바로 개시하였으니 고구려에겐 큰 위기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대소의 동부여는 멸망하는가?

 동부여의 견제 속에서도 유리왕의 고구려는 주변국들을 조금씩 정벌해나가며 국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편, 동부여는 고구려와의 오랜 소모전 탓에 어려움에 봉착하자 급기야 유리왕에게 화친을 위해 인질교환을 청합니다. 유리왕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해소하고자 앞선 포스트 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이미 태자로 책봉된 장남 도절(당시 12세로 추정)을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신하들의 강한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부여와의 약조를 어기고 마는데요. 이를 빌미로 "대소"가 이끄는 부여의 5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11월 폭설로 인해 부여군은 퇴각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부여와의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되죠.

 이후 유리왕의 아들이었던 도절과 해명이 잇달아 사망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소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나 이번엔 고구려가 먼저 동부여에 화친을 청하면서 전쟁은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무휼(대무신왕)의 시대에도 대소는 동부여의 군주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 다음은 대소가 대무신왕에게 패하기 전의 일화입니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째가 되는 어느날 대소는 고구려 측에 몸통은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

이에 대무신왕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

 이 답변을 들은 대소는 크게 노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준비를 서두르지만, 대무신왕은 선제공격으로 이듬해 괴유를 앞세워 부여를 침공했고 1년 뒤 대소는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당하고 맙니다.

  대소가 죽은 후 대소의 동생인 갈사왕은 갈사국를 세웠으나 대소의 사촌 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동부여는 큰 혼란에 빠지지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개토태왕때 굴복당하게 된 이후 494년(고구려 문자명왕 3)에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합병되었으며 이후로 부여의 모습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오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