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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잡학/역사

정말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의 성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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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성(姓)인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와 천민 계급인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와의 혼돈에서 발생한 오류입니다.

 상식적으로 천민은 성(姓)이 없는 신분이기에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가 천민의 성씨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조선시대에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의 몇 차례 혼란 속에 신분상승을 위해 돈으로 급조된 성이라 반박하는 이도 있지만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는 이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이 또한 설득력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씨의 경우 고려 초, 4대 임금인 광종에게 성을 하사받아(약 951년) 그 후로 고려 때에만 무려 36번의 최상급 벼슬(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한 명문 중의 명문가문이고요.

그렇다면, 천방지축마골피가 천하다는 얘기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 성씨와는 무관하게 7대 백정(白丁)을 한문으로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天은 무당
方은 목수나 미장이
地는지관 등 요즘의 장의사
丑은 소백정
馬는 말백정
骨은 뼈(고리)백정
皮는 가죽백정(갖바치)

를 말하는 것입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전까지는 천민은 이들뿐만 아니라 관노비(官奴婢), 사노비(私奴婢), 소작농(小作農) 등이 더 있었으며 양민 대부분과 중인도 공식적으로는 성(姓)이 불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관청이 인정하는 성(姓)을 가졌다면 양반의 자손으로 군역(軍役)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양반가문의 족보는 관청에서 관리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군적관리가 강화되고 중인과 양민이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국가에서 이들을 공식문서인 족보로서 양반으로 인정할 필요 때문이지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까지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7대천민은 ‘동대문 밖 갖바치 돌쇠’, 농노(소작농)와사노비는 ‘김(주인의 姓)가네 개똥이’등과 같이 불렸습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되면서 천민들은 주인의 성(姓)을 쓰거나 직업과 발음이 비슷한 성(姓)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이죠.

 또한, 족보관리는 군역 등에 신분차별을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족보관리가 관청이 아닌 각 문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족보는 예를 들어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파 공주문중’일 경우  문중보(공주문중)는 10년 단위, 종파보(대종파)는 20년 단위, 파보(계림군파)는 30년 단위, 대종보(경주김씨)는 60년 단위로 만들게 되는데 일본강점기에는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한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특정성씨라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 족보는 본보(本譜)와 별보(別譜)로 구분하였으며 갑오경장 이전 족보에서 가계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했는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혼란했던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57년 사이에 족보 대부분이 다시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전쟁으로 없어진 족보와 친인척확인목적보다는 각 문중의 경제적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 본보(本譜)와 별보(別譜)의 구분이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성(姓)을 갖게 되면서도 신분차별을 없앤 갑오경장(甲午更張)이전에 7대 천민을 비하하면서 부르던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가 발음이 비슷한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로 와전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덧붙여 일부에서 양반이 아니라도 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기록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임꺽정이 임씨가 맞을까요? 실록에 임꺽정의 형은 가도치로 가씨로 나옵니다. 성이 아니라 산도적이니 林으로 임꺽정의 형은 갓받치였으니 "가"로 표기한 것입니다.  <어떤오후>

[출처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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