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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마의, 효종의 강도준 신원회복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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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마의' 3회에서는 죽은 강도준(전노민 분)이 역모죄의 누명을 벗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강도준은 12년 전 소현세자(정겨운 분)의 죽음과 관련해서 역모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요.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최덕문 분)은 그동안 묻혀있던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재수사를 지시하였으며, 내용을 보고받은 효종은 성조(김창완 분)를 통해서 도준의 무고함을 널리 밝히고 가문의 모든 것을 신원하여 회복할 것을 명합니다. 이로써 도준은 죽은 지 12년 만에 역모죄 누명을 벗게 된 것이죠.



 

 인조에게는 네 명의 적자와 두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장남이 소현세자, 차남이 봉림대군(후에 효종), 삼남은 인평대군(인평대군의 7세손이 흥선대원군), 막내는 용평대군이었습니다. 앞선 포스트에 언급한바와 같이 "삼전도의 굴욕"에서 맺은 불평등 조약에 따라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붙잡혀 가게 됩니다.

 

 이때 효종은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청나라에 가서는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습니다. 생사를 위협받는 낯선 볼모지에서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돈독해졌는데요.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효종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가 볼모지인 청에서 보고 느낀것들은 상이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의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청을 배우자는 북학파로 되었고, 대군은 끌려온 우리백성들을 보면서 이런 치욕을 갚자는 북벌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 차에도  소현세자와 효종의 의리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종법을 무시하고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세웠고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사사하고 어린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병으로 죽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효종은 왕이 된 후에도 정통성에 대한 부담을 계속 가져가게 되며 아무리 우애가 남달랐다 하더러도 죽은 소현세자와 죄인이 된 형수 강빈과 조카들에 대해 효종이 베풀수 있는 호의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는 김홍욱 상소사건에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황해감사(黃海監司) 김홍욱이 강빈(姜嬪-소현세자빈 昭顯世子嬪)이 받았던 억울한 죄를 벗겨 주려고 상소했다가 죽은 사건. 이 상소로 왕의 노여움을 사 체포되어 온 김홍욱은 1654년(효종 5)에 친국(親鞫)을 당할 때 당시(인조 때) 조정 에는 조적(趙賊-조귀인 趙貴人)의 세력이 너무 컸었다는 것을 간(諫)하고, 1646년(인조 24)에 사사된 강빈(美嬪)과 그 후 유배되어 죽은 그 아들의 억울했음을 말하고 특히 어린아이를 벌하는 것은 하늘이 용서치 않는 일이라고 호소하였다. 이 같은 일을 모두 영의정이었던 김자점(金自點)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이라고 탄핵(彈劾)하여 임금의 분노를 사서 영의정 김육(金堉)·좌의정 이시백(李時白)·우의정 심지원(沈之源)·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대사간 유경창(柳慶昌) 등의 간원(諫願)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계속, 매를 맞아 죽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죄는 용서되고 1719년(숙종 45)에 이조판서와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추증(追贈)되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역모죄로 죽은 강도준의 무고를 어명으로 널리 밝히고 가문의 모든 것을 신원하여 회복할 수 있을런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물론 강도준과 관한 내용은 드라마이니 픽션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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