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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이산, 정조는 정말 독살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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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사계절 산해진미를 먹고 온종일 어의와 궁녀들에 둘러싸여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천수를 누려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사인은 고혈압, 당뇨병, 중풍 등이 일반적이었지만 재위 기간 내내 괴롭힌 질병은 바로 종기였습니다. 종기로 고생한 왕들은 세종, 세조, 현종 등으로 종기 때문에 몇 개월간 문밖출입을 못하고 누워 지낸 경우도 허다하고 심지어 이 일로 인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지 못해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역대 왕들이 온천을 자주 찾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데 이런 온천행에도 많은 제약이 있어 종기가 생겨 온천을 가려고 해도 왕의 어가 행렬이 민폐를 끼친다고 신하들이 만류하면 갈 수 없었고 가뭄, 홍수 등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있어도 왕의 부덕이라는 눈치가 보여 가지 못했다 합니다.

 

■ 정조는 지병이 있었나?

 정조 또한 등에 난 종기 때문에 고생했지만 꾸준한 치료 덕분에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만큼 심해지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정조실록을 봐도 정조가 종기로 치료를 받으면서 평상시처럼 활동하고 정사도 돌봤다고 나와있습니다.


■ 등창때문이 아니라면 정말 독살이었을까?

 1800년 5월 정조는 "오회연교"라는 교지를 통해 중대한 발언을 하는데요. 그 내용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용서를 빌라는 경고와 새인물을 재상으로 등용하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오회연교는" 노론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정조의 죽음에 의문을 가게 하는 부분인데 "오회연교"발언 후 한달뒤에 갑작스레 사망하니 그 의혹이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정조의 등에 난 악성 종기를 치료하려고 연훈방이라는 치료법을 이용했는데요. 당시엔 왕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는데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이니만큼 세균 감염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수은 증기로 치료하는 연훈방이 사용되었는데 바로 이 수은으로 말미암은 중독으로 정조가 사망했으며 이 치료과정에는 정순왕후와 노론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 치료를 주관한 쪽은 자신의 병세를 관찰하며 직접 처방할 정도로 해박한 의학지식을 가진 정조와 소론이었습니다.

 또한, 연훈방이라는 치료는 최근 어느 한의대의 연구에 의해 수은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지만, 당시 약재의 처방대로라면 독살로까지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니 최근까지 정설로 알려졌던 정조 독살설은 그 힘을 잃어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정조사망 당시 그 옆을 지켰던 사람이 다름 아닌 정순왕후였으며 정조가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이 "수정전(정순왕후가 기거하던 곳)"이라는 점은 아직도 그의 죽음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 독살이 아니라면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추정 1. 잘못된 약재의 사용
 정조는 의학적 지식도 남달라 그가 종기 치료를 받을 때에도 몸의 거부반응과 약물에 대한 의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몇 가지 약재에 대한 복용을 거부했었는데요. 이중 하나가 경옥고(瓊玉膏)였습니다.  경옥고는 인삼이 든 처방으로 정조는 “초기 열 증상의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는 것 같다”라며 의심하였으며 사망하기 나흘 전에도 경옥고의 복용을 권유받자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한다.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숨지기 이틀 전 연훈방을 사용한 이후 증상이 호전되자 정조는 경옥고를 복용하는데요. 이때부터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위독한 상태에 빠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추정 2. 격무에 의한 스트레스, 그렇다면 과로사?
 정조는 과거시험에서 수천 명을 뽑을 때에도 그들의 답안을 일일이 살폈다고 전해지니 필시 신하들에게 일임해도 될 조정의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한 것으로 보여지니 그의 과한 업무량은 도를 넘었지 않았나 보입니다. 이런 격무로 말미암아  정조는 집권 후기에 급격한 노쇠현상을 보였는데요. 시력 또한 급격히 떨어져 안경이 없이는 글을 읽을 수 없을 지경에 놓였으며 같은 연배인 신하들보다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늘어났다 합니다.

 


결국에는 정사에 조금만 신경 쓰더라도 몸을 가두기 힘들 정도에 놓였으니 아마도 정조의 사인은 격무로 인한 과로로 급격히 떨어진 체력으로 면역력마저 떨어지니 6월 초여름 더위에 더욱 심해진 종기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바 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을 과로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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