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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황희 정승은 청백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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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黃喜, 1363~1452) 고려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30세(1392)되던 해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이력으로 빛을 보지 못하다 태종이 왕이된 후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실록에도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고,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태종의 신뢰는 대단하였다 합니다.

 하지만, 14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교하 지방(지금의 경기도 파주군)에 유배되었다가 교하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져서 5년의 유배생활을 더하게 됩니다. 이때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통루(지금의 광한루)를 만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세종이 황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기엔 남원은 너무 먼 곳이 아닐까요?)

 태종이 물러난 뒤인 1422년(세종 4면)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에 오를 만큼 세종의 신뢰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87세라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황희는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였으며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다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황희는 현재까지도 청백리로 대표되는 조선최고의 정승으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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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황희는 24년간 재상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조선 왕조실록에는 황희가 사간원과 사헌부의 단골 '탄핵 대상' 일 정도로 자주 황희의 비리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뇌물수수와 관직 알선이었습니다.

1. 한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그에게 땅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인데요. 한마디로 땅문서와 벼슬자리를 교환하자는 거래였던 것이죠. 황희의 비리를 포착한 사헌부는 그 즉시 황희의 비리 사건을 조정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는데 그럼에도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심하자 세종은 마지못해 황희를 잠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얼마되지않아 다시 영의정으로 기용하기까지 합니다.


2. 황희의 사위가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사망시키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 살인사건은 아주 '조용하게' 처리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샀는데 이 사건의 수습과정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있었다합니다.

이처럼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는데요. 당시 조정의 실세라고 불리던 황희-맹사성이 동시에 수습에 나섰으니 그 왜곡과 조작이야 오죽 했겠지만 이 사건은 그렇게 황희와 맹사성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마는듯 했지만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기 시작하자 그 배후에 여러 지방 관아 수령들 뿐 아니라 형조판서 서선이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뒷배를 봐주고 잇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아."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황희를 파직했다가 채 1년도 안 되어 다시 기용하는 또 한번의 파격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3. 이런 비리 사건에 휘말린데다가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박포는 '제 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오히려 이사실을 알게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제 2차 왕자의 난'이 끝난후 방간의 배후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수됩니다. 이때 박포의 아내는 도망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를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위 사실이 조금은 과장된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점과 당시의 고위 관직에 있던 이들의 일반적인 행보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물론 간통은 빼고) 황희는 그 청렴함보다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 및 그 영향력으로 인해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오후>

★ 참고 : 황희의 '청백리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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