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매]일지매를 능가했던 조선 최고의 검객은?

  "SBS 일지매"에서 인조를 보필했던 당대 최고의 무사 2인 중 한 명인 지금의 봉순 아비에게 무술을 전수받고 진정한 일지매로 거듭나는데요. 실제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능가했던 최고의 검객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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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검객 3인을 소개합니다.


☞ 조선 최고의 검객 부자(父子) - 김체건, 김광택
<출처 : Tong - 화려한 飛上™님의 역사/민족통>

총칼을 들이밀고 조선에 진군했던 왜군은 명군의 압력으로 인해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평양성에 머물며 평화협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군 내부에서도 많은 분열이 일어났고, 조선에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왜군장교들이 조선군에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군에서는 이들 중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들을 선별해서 직위를 주었고, 이후 이들은 왜군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공들과 왜검을 제작하는 도검장, 그리고 왜검을 가르쳤던 장교들은 실전에 바로 배치되어 조선군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검술은 아주 구체적으로 상대의 뒷목이나 팔꿈치 등을 공격하는 것으로, 실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기술들을 조선군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을 피 흘리게 한 일본의 검술이 이제는 조선 군영에 보급되어 왜군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진군의 나팔을 불었던 왜군들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왜관에 숨어들어 검술 익힌 김체건, 숙종을 놀래키다

임진년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인 1636년 12월 6일, 청나라는 왜군의 진공 속도보다 더 빠르게 말을 타고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조선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그 말발굽 소리는 이른바 '조선시대 최악의 치욕'으로 불린 병자호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채 45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뒤로하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갈수록 전쟁의 양상은 속도전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기병을 강화하고 화약무기를 개량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선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어렵게 얻은 왜검법이 조금씩 희미하게 사라졌고 군영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현장에서 개인 군사들이 서로 창칼을 맞대고 싸우는 것은 최종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이었기에 왜검법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숙종 대에 훈련도감의 군교였던 김체건은 동래 왜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왜검의 기법을 훔쳐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놓고 있습니다.

"김체건은 숙종 때 훈련원에서 무예를 더 익히기로 하였는데, 조선의 검술이 왜인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왜관에 들어가 하인 노릇을 하였다…(중략)…체건은 그들끼리 검술을 겨눌 때 남 몰래 지하실에 숨어 엿보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왜인의 검법을 다 익히게 되었다." <유본학, 김광택전>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김체건이 조선통신사 연행에 함께 참여하여 일본에 건너가 직접 왜검법을 익혀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검법에 대한 공부는 쉼이 없었습니다.

몇 년에 걸쳐 남의 집 하인 노릇을 하며 검술을 훔쳐 배우고, 당시에는 결코 가깝지 않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왜검을 익히고 온 그는 아마도 뜨거운 열정에 뭉친 조선의 무사였을 것입니다.

▲ 동래부사가 초량 왜관에 온 일본 사신을 맞이하여 의례를 지내는 장면을 그린 <동래부사접왜도> 입니다. 칼 두 개를 허리춤에 찬 일본무사들과 허리에 띠돈을 메어 칼날이 아래로 가도록 하는 조선 검객들의 환도패용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렇게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검술 연마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김체건은 드디어 검술의 고수가 되어 다시 훈련도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새롭게 배운 검법을 조선 군영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임금님마저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드디어 그가 숙종 앞에서 자신의 검술 실력을 평가받는 날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의 관한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보법', 즉 걸음입니다.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 보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수인지 하수인지를 평가할 만큼 중요합니다. 보법이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놀라운 무공이라 할지라도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숙종께서 체건을 불러서 시험하였는데, 체건은 칼을 떨치며 발뒤꿈치를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었다." <무예도보통지, 왜검 편>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재를 땅에 깔고 맨발인 채 두 엄지발가락으로 재를 밟고 나는 듯이 칼춤을 추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나간 자리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임금까지 감동하여 그를 검법 교련관으로 임명하고 조선군에게 그의 검법을 전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검법에 대한 열정은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그 또한 검선이었다

이렇듯 숙종에게도 총애를 받아 조선 최고의 검법 교련관으로 불리던 김체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광택이었습니다. 그 또한 당대에 이름을 날린 검객으로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피나는 검법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김광택전>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의 칼춤 실력이 신의 경지에 도달해서 '땅 위에 가득 떨어진 꽃이 쌓인 것처럼 칼에 몸을 숨겨 보이지 않는다'라고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나이 여든이 되어도 얼굴빛이 어린 아이와 같고 그가 죽던 날 남들은 그의 몸은 남아 있고 혼백만이 빠져나가 신선이 되었다며, 그를 신선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마도 부자가 나란히 검법의 고수로 이름을 날린 경우는 김체건·김광택 부자가 처음일 것입니다.

비록 당시 원수의 나라 검법이지만 그것이 조선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김체건과 그의 아들 김광택은 왜검법을 배우기 위해 혼심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후 검법을 연마해서 조선화된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기에 까지 이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 준 김체건 부자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 조선 검객의 자존심 - 김명순
<출처 : 네이버 지식IN - panflu님의 글>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이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 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신무기였던 조총의 사정거리나,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던 한국의 검술을 생각해 볼 때 김명순은 조선 검객의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 가지 않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 진정한 조선의 협객 - 백동수
<출처 : 유짱님의 블로그中 백동수 (白東脩·1743∼1816)-텔산 초계문신님 글>

 정조가 통치하던 조선은 조선문화의 중흥기.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홍대용 등 걸출한 인재도 많이 배출됐다. 그러나 이들과 동시대 인물인 백동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유교적 이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조선에서 그는 무인이자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역사적 약자였다. 그래서  매부인 이덕무, 친구인 박제가, 박지원 등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반면 (이덕무와 박제가도 서얼이었으나 문인) 안타깝게도 무인 백동수는 문집은 물론 행장 하나 남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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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中 "백동수"


 그는 정조가 아끼고 박지원과 이덕무가 사랑한 선비였으며 사라진 전통무예의 맥을 되살린 무예가이다. 그는 숙종 때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에게 조선검법을 전수 받는 한편, 도가적 전통단학으로 내공을 쌓고 만약의 부상에 대비해 의술까지 익혔다. 이처럼 그는 청년시절에는 학문을 멀리하고 무협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주위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의 주위에는 박제가, 이덕무, 김홍도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년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박지원과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동수는 1771년 식년무과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조선후기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산골에서 들어가 10여년 농사를 짓고 조선의 무예를 연마하며 보냈다. (야뇌(野餒)라는 호가 여기서 등장했으리라 본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 받았고, 1788년 마흔 다섯에 드디어 장용영 초관(한 초(100명)를 거느리던 종9품 무관 벼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가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고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정조의 명을 받아 무예서 간행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790년(정조14년) 4월 29일, 마침내 지상무예 열여덟 가지와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총 정리하여 무예24기를 수록한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가 49세의 한창 나이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802년 정월,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무장들은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싸이트 : 네이버백과사전 /
http://www.hwasong.org(화성연구회) / http://blog.daum.net/jeungsando
* 참고문헌 :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