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장영실의 명나라 행, 그 진실은?



 1421년(세종 3년) 상의원에 근무하던 장영실은 세종의 명으로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발탁됩니다. 명으로 떠나는 장영실에게 세종은 중국의 물시계와 황실 천문대인 흠천감에 설치된 천문기구인 혼천의를 보고 도면을 그려오라는 중요한 소임을 맡기게 됩니다.

☞상의원(尙衣院])
조선 시대에,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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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은 아라비아와 함께 천문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였는데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방침으로 했던 조선은 매년 11월 중국에 동지사를 보내 역서를 받아 그것을 그대로 조선의 책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드라마에서처럼 일식이 시작되는 시간이 맞지 않아 임금들이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사대교린(事大交隣)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올려 이를 뒷받침하였다.

일식은 하늘이 내리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던 때라 일식이 일어날 때면 그 시간에 맞춰 왕이 소복을 입고 제를 지내게 되는데요. 북경과 한양사이에는 경도차가 존재하니 중국의 역법을 토대로 계산하면 당연히 오차가 일어 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만의 천문학기술을 원했던 세종의 열망은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종의 명을 받고 관노의 신분이지만 특별히 명나라 사신의 대열에 합류했던 장영실은 드라마와는 달리 황실 천문대인 흠천감에는 발조차 들이지 못하는데요.

당시 명나라에서 천문학은 황제만이 다루는 학문이라 하여 흠천감에 근무하는 천문학자들은 황제를 대신해 하늘을 관찰하는 자들로 한번 흠천감에 들어오면 절대 다른 보직으로 이동할 수 없으며 함부로 다른 이와 천문학에 대해 논의 하는 것 조차 법으로 금지하였고 개인적으로 달력을 만드는 자 또한 사형에 처할 정도로 천문학에 대한 기밀유지는 대단하였다 하니 장영실의 흠천감 출입은 불가능하였던 게 확실한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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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장영실은 조선에 빈손으로 돌아온 것일까요?

이듬해인 1422년 명나라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곧바로 천문기구가 아닌 자격루(자동 시보 장치)제작에 몰두하는데요. 장영실은 명나라에 체류하면서 경계가 삼엄했던 천문 기구와 당시로선 첨단을 자랑하던 여러 기술들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북경의 거대한 서점가를 뒤져서 물시계를 비롯한 명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수 많은 선진기술이 소개된 서책들을 조선으로 들여오게 됩니다.

뛰어난 금속 제련기술과 과학적 역량을 지닌 장영실이라 해도 명에서 가져온 여러 서적만을 토대로 자격루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십 수 년만에 완성한 자격루는 1434년 조선의 표준시계가 됩니다.

명에서 돌아온 직후 장영실에게 세종은 그 공과 뛰어난 기술력을 치하하여 관비의 신분을 없애고 관직을 내리려 했으나 이조판서 허조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1423년 결국 장영실은 정5품 상의원 별좌의 관직을 받고 관비의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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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명에서 돌아온 장영실이 자격루가 아닌 천문학 기구 개발에 착수하는 것과 명나라에서 경계가 삼엄한 혼천감에 옛 애인 다연의 도움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은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장면입니다. 또한, 현재 세종의 측근인 황희와 대결구도로 설정된 병조판서 조말생은 이판 허조와 반대로 장영실의 관비신분 해방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인물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장영실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에 대해 포스팅할까 합니다. <어떤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