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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이산 최후의 승자는 대비인 정순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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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규수들이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유독 한 규수만이 맨바닥에 앉아있자 그 이유를 물으니 "방석에는 아비의 함자가 쓰여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데요.  (당시 각 규수가 준비해간 방석에는 자리 표시를 위해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답니다.)

또한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제각기 바다니 산이니 뻔한 답을 늘어놓았으나 이 중 한 규수가 사람의 인심(人心)이라 하였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왕비간택을 위해 후보감들에게 던진 이러한 질문에 김한구의 딸 김씨가 대답한 일화로 이러한 그녀의 됨됨이에 반해 영조는 김씨를 왕비로 택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조선의 운명을 끝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될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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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 김씨는 1745년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나 열다섯 살이 되던 1759년에 영조의 계비가 되었습니다. 이때 영조의 나이 예순여섯으로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당시의 법으로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입니다. (아들뻘인 사도세자와도 열 살이나 어렸답니다.)

 이 당시 조정은 소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위기감을 일축시키려고 노론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를 견제하다 결국 풍산 홍씨 가문(혜경궁 홍씨 가문)과 연합하여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만들죠.

  사도세자를 죽게 하였으니 정순왕후 김씨와 그의 동생 김귀주는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즉위하면 그 보복으로 김씨 집안이 몰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세손이 왕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보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정순왕후가 우려했던 데로 정조는 왕이 된 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후겸, 홍인한 등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 모두 사사시켰으며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 또한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비록 대비이긴 하였으나 이미 성인이 된 정조를 두고 대리청정도 할 수 없었기에 정순왕후는 고작 단식 등의 방법으로 항의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자신의 정적들을 처단한 정조는 자신이 왕이 되기 전부터 구상했던 개혁정책을 한하나 실현해나가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개혁 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네 번째 후궁 수빈 박씨에게서 얻은 순조를 왕세자로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던 해에 그만 사망하고 맙니다. 정조가 사망할 당시 정순왕후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훗날 독살이 정조 사망의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쉴새없는 개혁정치로 말미암은 과로와 지병으로 인한 사망에 그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열한 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는데요. 역사에서는 정순왕후가 대신들의 수렴청정 요청을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고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숨죽이며 기다려온 정순왕후가 이런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죠.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정순왕후는 자신의 세력인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고 정조 재위 기간에 개혁의지를 함께 하며 등용된 시파와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시발점이 바로 천주교 탄압이었습니다. 당시 남인들은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당하면서 천주교, 즉 서학을 수용했기에 이를 빌미로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순조 1년에 일어난 무려 100여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된 신유박해(辛酉迫害)입니다.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인륜을 무시하는 이단을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정약용, 박제가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숙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즈음 여기저기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순조 3년 12월에는 창덕궁마저 크게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민심이 흉흉해 지기 시작했는데요. 정순왕후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것을 막기 위해선수를 쳐서 수렴청정을 거두려 합니다. 물론 조정 대신들이 그 명을 철회해달라 간청하기를 내심 원했지만요.

  이런 정순왕후의 바람을 무산시킨 이가 등장했으니 바로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었습니다.결국, 김조순에 의해 수렴청정을 거두게 된 지 1년 후인 1805년 1월 정순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예순한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써 열다섯 살의 어린나이로 궁궐에 들어와 정조로 말미암아 숨죽이며 살다 훗날 최고의 권력으로 마치 한풀이하듯 세상을 호통했던 정순왕후의 파란만장한 생이 마감됩니다.

  정순왕후 김씨의 전횡은 영,정조시대를 시작으로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었습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김씨 일문은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그 유명한 안동김씨 집안의 집권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맙니다. 이후 안동김씨 일문은 60년 동안 세도정치를 하며 조선의 운명을 단축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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