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승하하기까지 정조가 개혁하려 했던 거의 모든 국책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에서는 홍국영만 두드러진 채 채제공은 정조의 측근인사 정도로만 묘사가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인 본받을만한 활약을 펼쳤던 채제공(蔡濟恭)을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이며 밥 짓는 연기도 주방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라고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밝힙니다.
과거에 급제한 5년 뒤인 1748년에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청요직인 예문관 한림을 선발하는 한림회권이 있었는데, 당시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상황에서 소수파 남인을 추천하는 관료는 없었습니다. 이때의 남인들은 국외자 혹은 나그네 신하 정도로 대접받았기 때문이었는데요. 이때 탕평을 표방한 영조의 특명으로 채제공에게 권점(관원선발 시 심사원이 맘에 드는 후보자의 이름 위에 둥근 점을 찍는 것) 두개를 하사해 시험를 볼 수 있는 최종 후보자 자격을 얻었고 이 혜택으로 소시에 통과해 사관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이는 1728년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소론·남인 급진파의 반란인 무신난 평정에 공을 세운 채제공의 스승 오광운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 계승시키려 한 영조의 배려이기도 했는데요. 채제공은 바로 영조의 탕평 정책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인재였던 것입니다.
도승지가 오른 1758년,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는데 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에게 채제공을 지적해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으며 앞선 포스트에서처럼 그 유명한 금등문서를 채제공에게 남기게 되죠.
☞ 영조시대 채제공의 활약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영조가 앞장서서 추진한 균역법의 실시 과정에서 야기된 폐단의 시정과 변방 대책을 진언했으며 1755년 소론 강경파를 제거하려는 나주괘서 사건의 공으로 동부승지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채제공은 죄인을 포도청으로 내려보내 지나친 형벌을 가해 억지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진언함으로써, 그런 상황에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진언을 하겠는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1770년부터 병조·예조·호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국정의 핵심 인사로 활약하였는데 그가 1772년 이후에 왕세손의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이 되면서 향후 정조와 더불어 나라를 이끌어 갈 인연을 맺게 됩니다.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영조가 앞장서서 추진한 균역법의 실시 과정에서 야기된 폐단의 시정과 변방 대책을 진언했으며 1755년 소론 강경파를 제거하려는 나주괘서 사건의 공으로 동부승지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채제공은 죄인을 포도청으로 내려보내 지나친 형벌을 가해 억지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진언함으로써, 그런 상황에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진언을 하겠는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1770년부터 병조·예조·호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국정의 핵심 인사로 활약하였는데 그가 1772년 이후에 왕세손의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이 되면서 향후 정조와 더불어 나라를 이끌어 갈 인연을 맺게 됩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할때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했으며 1777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의 주도로 정조를 암살하려 한 사상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을때는 궁궐을 수비하는 수궁대장을 한동안 맡기도 했으니채제공에 대한 정조가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으며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홍국영과 채제공은 정치적 성향, 학문적 기반, 당파 등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그가 쫓겨난 이유도 홍국영이 외척당(홍인한, 김귀주, 정후겸 등)을 처리할 때 그에 동조한 것이 노론의 미움을 사 그렇게 된 것이지
홍국영과 채제공이 정말로 친밀했던 관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홍국영은 노론 청명당 계의 김종수(이산에서 장태수역), 산림이었던 송덕상과 친밀했었습니다.
김종수는 홍국영이 제거될 때 그를 제거하자는 상소를 손수 올려야만 했고, 송덕상 또한 홍국영의 후원자였다는 이유로 홍국영이 퇴출된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홍국영과 채제공이 정말로 친밀했던 관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홍국영은 노론 청명당 계의 김종수(이산에서 장태수역), 산림이었던 송덕상과 친밀했었습니다.
김종수는 홍국영이 제거될 때 그를 제거하자는 상소를 손수 올려야만 했고, 송덕상 또한 홍국영의 후원자였다는 이유로 홍국영이 퇴출된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1790년 7월 정조가 행한 탕평책의 일환으로 그와 함께 우의정에 임명되었던 당시 노론의 중심이었던 김종수가 모친상을 당해 물러나자, 이후 3년 동안 독상으로 정사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도성 안에서 물화를 독점 판매하려는 시전의 물가 조작이 계속되자, 신해통공 정책을 실시해 국가의 필수품을 담당하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애는 조치를 취해 정조의 개혁정치를 가속화 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기 1년전인 1799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채제공은 정조의 개혁정책의 결실을 보지 못한채 역사속으로 사라지는데요. 죽은 뒤에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습니다.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며 정조가 추구했던 개혁과 애민 사상에 동반자로 있으며 뛰어난 지도자의 역량으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던 채제공의 이러한 행보에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점이 분명히 있어 보이는 듯합니다. <어떤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