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매]조선 최고의 무능한 임금, 인조!

 "SBS 일지매"는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입니다. 드라마에서 인조(김창완 분)는 그 냉혈함과 비열함으로 보는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는데요. 사실 드라마와는 달리 인조는 조선시대 최악의 굴욕적인 왕으로 평가받고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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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에 마침표를 찍었던 중종반정과 달리 역모에 휘말려 광해군에게 자신의 아우를 잃은 인조나 기득권을 빼앗긴 서인세력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영달을 위해 일으킨 반란이었을 뿐입니다.

친명배금의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임란이후에 피폐해진 조선땅에 또 다시 두번의 전쟁을 겪게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지옥보다 못한 곳으로 추락시킨 인조의 굴욕적인 일대기를 연표로 살펴봅니다.


1623년(광해군 15 / 인조 1, 癸亥) 
- 인조반정(仁祖反正). 광해군 폐위, 능양군(綾陽君, 인조) 즉위.
- 이이첨, 정인홍 등 광해군의 척신 처형.
- 폐왕을 광해군(光海君)으로 강등함.
- 폐세자(廢世子)를 사사(賜死)함.
- 유몽인(인조반정 반대) 피살됨.

1624년(인조 2, 甲子)
- 도원수(도원수) 이괄(李适) 반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짐)
- 인조가 공주로 피난
 (반란군이 개성 거쳐 벽제에 이르자 인조는 공주로 도피하나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 없었음)

☞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관서(關西)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1626년(인조 4, 丙寅)

- 11월 남한산성을 쌓고 수어청(守禦廳)을 설치.
 

1627년(인조 5, 丁卯)
- 후금(後金)이 침입. 정묘호란(丁卯胡亂).
-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함.
- 후금과 화약(和約)후 인조, 강화에서 귀경.
- 횡성의 이인거(李仁居)가 반란하여 처형.

☞ 정묘호란

후금(청)의 건국자 누루하치의 사망과 산해관 패전으로 대내외적으로
동요가 일어나자 그 후계자 홍타이치가 그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
이는 주변국에게 청의 강건함을 보여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보여짐.



1628년(인조 6, 戊辰)
-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하여 처형.

1629년(인조 7, 己巳)
 - 양경홍(梁景鴻) 역모사건이 일어남.


1630년(인조 8, 庚午)
 - 명의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군사가 의주성을 노략질하고 도주함.


1633년(인조 11, 癸酉)
- 척화(斥和)의 명을 내리고 후금에 대비케 함.


1636년(인조 14, 丙子)
- 후금의 사신 용골대(龍骨大)가 옴. 홍익한(洪翼漢)이 용골대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함.
- 최명길(崔鳴吉)이 청과 단교(斷交)의 잘못을 논함.
- 청군 침입.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함.

☞ 병자호란

후금의 막대한 공물요구와 명과 후금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해온 조선에게 분명하게 후금(청)의 신하가 되라는 선택강요에 조선조정이 이에 반발, 요구해온 공물과 청에게 복종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명나라 편에 섬으로서 야기된 전쟁.
애초에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명나라에 사대주의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에 대해 청이 마치 이빨빠진 호랑이를 섬기는 조선의 행태에 대해 경종을 주고자 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등거리외교로 청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그런 이유로 정묘호란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있을 턱도 없거니와, 잘 생각 해 보면,정묘호란이 일어난 다음에도 국제정세에 바르게 대처하여 청과의 외교를 가까이 했더라면 병자호란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건만, 나라의 운명을쥔 위정자들이 이를 바로보지 못하고 결국 애꿓은 백성들만 그들의 말발굽아래 짓밝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1637년(인조 15, 丁丑)
-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 2월 후금군 철수.
- 3월 홍익한(洪翼漢, 1586-1637), 윤집(尹集, 1606-1637), 오달제(吳達濟, 1609-1636)가 청에 잡혀가 심양(瀋陽)에서 살해됨.
-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 삼전도의 치욕
 인조 14년인 병자년(1636) 12월 초에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조선은 적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청나라의 강력한 군대에 전황은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남한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산성에는 겨우 만이천여명이 있었고. 먹을것도 50일분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해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나 이 때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그 사이 청의 군사들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꿇고 항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청은 조선에 강화조건을 제시합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입니다.


1640년(인조 18, 庚辰)

-  청태종이 임경업(林慶業)의 수군을 책망함에 임경업의 군대가 개주(蓋州)에서 돌아옴.


1641년(인조 19, 辛巳)
-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심양에서 돌아옴.
-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죽음.
- 소현세자가 이완(李浣) 임경업과 함께 청의 금주성(錦州城) 공격에 참가함.

1644년(인조 22, 甲申) 
- 심기원(沈器遠) 등이 모반으로 처형됨.
- 소현세자가 청의 서정(西征)에 참가.
- 임경업이 명에 투항했다는 소문이 들림.

1645년(인조 23, 乙酉) 
- 1월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옴. 귀국할 때 독일인 신부 아담샬(湯若望)에게 천문(天文), 산학(算學), 천주교(天主敎)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천주상(天主像)을 가지고 옴.
- 3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의문의 죽음.
- 5월 봉림대군(소현세자의 동생)이 돌아옴.
- 6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

1646년(인조 24, 丙戌)
- 소현세자빈(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함.
-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처형됨.

☞ 임경업 장군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되어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았으며, 명나라의 반역자 공유덕의 반란을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의주 부윤이 되었으나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가, 혐의가 풀려 다시 복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로 쳐들어온 후금 (청나라)을 맞아 백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잘 막아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참전, 명나라와 미리 내통하여 청나라에 대항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하였다. 1643년에 명나라로 가서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또 다시 포로가 되었다. 좌의정 심기원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에 돌아와, 임금으로부터 신문을 받다가 김자점의 음모로 죽임을 당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1647년(인조 25, 丁亥)
-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에 유배함.  <어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