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요절한 세종의 맏딸 정소공주는 누구?


 소헌왕후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입니다.

 이 중 정소공주는 문종보다 먼저 태어난 딸로 충녕이 왕이 되기 전 사가에 있던 시절에 처음 보게 된 자녀로 그 성품과 총명함이 남달라 세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맏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세종은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하며 이일 때문에 지병인 소갈(당뇨)과 안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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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실록에 남겨진 정소공주의 사망당시의 기록입니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2월 25일(신미) 1번째기사
왕녀가 궁중에서 졸하니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예장·조묘 두 도감을 설치하다.
왕녀(王女)가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니, 나이 13세이었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육선(肉膳)도 철수하였다. 예장(禮葬)·조묘(造墓) 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부정윤(副正尹) 이석(李碩)이 상례를 주장하게 하였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2월 25일(신미) 4번째기사
왕녀의 습과 대·소렴, 전의 품수를 정선 공주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2월 25일(신미) 5번째기사
예조에서 왕자·왕녀의 초상에는 염빈 도감을 혁파할 것을 청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2월 26일(임신) 1번째기사
왕녀의 수륙재를 2품 이상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전지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2월 26일(임신) 2번째기사
왕녀의 빈소를 어려서 자랐던 총제 이맹균의 집에 차리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3일(기묘) 2번째기사
- 내관 최득룡에게 명하여 왕녀에게 사제한 제문
내관(內官) 최득룡(崔得龍)에게 명하여 왕녀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그 제문에 말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수요(壽夭)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비록 옮길 수 없는 것이나, 부녀간의 지극한 정리는 스스로 끊을 수 없구나 슬프다. 너의 일생은 연약한 여식으로 자라났다. 자태가 단정하고 맑으며, 품성(稟性)은 곧고 아름다우며, 손을 이끌고 다닐 때부터 효제(孝悌)함이 너의 행실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은 성인(成人)과 같았다. 자애의 정이 쏠리어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다. 네가 결혼하여 함께 편히 영화를 누리려 하였더니, 어찌 어린 나이로 하찮은 병에 걸려 좀 더 살지 못하고 드디어 대고(大故)를 당할 줄 뜻하였으랴. 조섭(調攝)을 잘못 하였던가, 기도함이 궐(闕)하였던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음과 용모는 완연하건만 정상(精爽)한 넋은 어디로 갔는가.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며, 눈물을 참으려 하니 가슴을 적신다. 빈실(殯室)에 치제(致祭)하여 슬픈 회포를 펴고자 하니, 넋이 알음이 있거든 내 이 말을 알리라.” 하였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3일(기묘) 4번째기사
왕녀에게 정선 공주와 같이 칠곽을 사용하라고 명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4일(경진) 4번째기사
- 세자가 중사를 보내 왕녀에게 치제한 제문
세자(世子)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왕녀에게 치제(致祭)하였다. 그 제문에 말하기를,
“아아, 영(靈)은 자태가 아름다웠고, 품성은 유순하고 아름다웠다. 양궁(兩宮)께서 사랑하시어 집을 이루기를 원하였더니, 슬프다. 조물(造物)이여, 어찌하여 너에게 긴 나이를 주지 아니 하였는가. 한 탯줄의 정이 간절하여 가슴만 만지며 눈물 흘리노라. 영원토록 길이 떠났으니 이 술 한 잔을 권하노라. 영(靈)이여 흠향하라. 오직 나의 슬픔을 고한다.” 하였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10일(병술) 2번째기사
예조에서 왕녀의 예장에 묘표와 지석이 있으니 비석은 세우지 말 것을 청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23일(기해) 5번째기사
- 예문 제학 윤회가 찬한 왕녀의 묘지명
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 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23일(기해) 6번째기사
왕녀의 추증을 시행하도록 예조에서 아뢰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25일(신축) 5번째기사
왕녀의 우제를 세 번만 거행하게 하다.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27일(계묘) 2번째기사
왕녀에게 추증하기를 정혜 공주로 하다.

▶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4월 4일(기유) 4번째기사
왕녀의 시호를 정혜에서 정소로 고치다.
왕녀의 시호(諡號) 정혜(貞惠)를 고쳐서 정소(貞昭)라고 하였는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 옹주와 시호가 같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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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실록 중 세종이 내관 최득룡에게 명하여 죽은 딸에게 사제한 제문을 쉽게 풀어봅니다.

아비는 말하노라.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으므로
비록 움직일 수 없는 바이지만,
부녀간의 지극한 정리는 스스로 끊을 수가 없도다.

슬프다! 

너의 일생은 연약한 여식으로 태어나
자태가 단정하고 맑았으며 품성이 곱고 아름다웠도다.

내가 너의 손을 이끌고 다닐 때
너의 행실은 진실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같이 훌륭하여 자애의 정이 쏠려
너를 어루만지고 사랑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도다.

네가 혼인하여 함께 편한 삶을 누리려 하였더니
어찌 하찮은 병에 걸려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마침내 이런 슬픔을 당할 줄 뜻하였으랴.

아비가 병구완을 잘못한 까닭이냐,
너의 고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완연하건만
곱고 맑은 너의 영혼은 어디로 갔다는 말이냐.

가슴을 치며 통곡하노라.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구나.
이제 현실에 지체하여 나의 슬픈 회포를 풀고자 하노라.

넋이여 
앎이 있거든 이 내 말을 부디 들어 주려무나.
<어떤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