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驪興:지금의 여주 부근))이며 여흥부원군(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습니다. 1382년(고려 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이방원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세제로 책봉되면서 세제 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보다 두 살 많은 연상으로 태종이 험난한 역경을 겪으며 왕이 되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1398년 "제 1차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의 기습공격을 예상하고 태조(이성계)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
효령대군은 태종(이방원)의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글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활쏘기에 특히 능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아 사냥터에 항상 따라 다녔던 부분은 현재 드라마에 나오는 효령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두터운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으나 양녕의 카리스마적 기질과 충녕이 가진 성군의 자질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개국 초기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으로 동요하는 백성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유ㆍ불 조화론을 주장하였고, 불서 번역과 사찰 보수 등 불교 정신에 입각한 보국안민(輔國安民)에 힘쓰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을때 효령은 ..
어제 방영된 "SBS 일지매" 12회에는 병판 변식대감과 청나라 역관이 독대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복장으로 봐선 청나라인이 분명한 듯 보이나 사실 이 사람은 조선사람입니다. 매국노 정명수(鄭命壽)를 소개합니다. 평안도 은산(殷山)출신으로 관노(官奴)였던 정명수(鄭命壽)는 원래부터 성품이 교활하였다 합니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나중에 청나라)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에게 1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는데 이때 정명수(鄭命壽)도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습니다. 1629년(인조 7)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간 강홍립의 군대는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해 후금에 항복할 때 포로가 되는데요...
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를 직계(直系),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방계(傍系)라고 하는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이른바 방계승통으로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본인에게는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죠.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중신들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 받게 됩니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그의 지지파인 대북파가 앞장서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의 왕족과 그들을 지원하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켜버립니다. 이 사건으..
평도전 드라마 초반에서 왜인 첩자로 처음등장했지만 실제 첩자는 아니고 태종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사람으로1407년 궁중에 진상되는 고기, 소금등을 관장하는 사재감(司宰監)의 원외사재소감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뒤에 정3품인 상호군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또는,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의 명으로 조선에 들어와 관직을 재수받고 일을 배우던 인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평도전은 왜선(倭船)을 만들어 한강에서 조선 병선과 그 속력의 빠르기를 비교해 보이기도 하고, 대마도를 오가며 조선국왕의 의중을 전하고 대마도주의 답변을 받아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도전입장에서는 동족인 왜구를 섬멸하는 일에 적극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평도전에게는 아들 평망고(..
[대왕세종]에서 미개한 해적무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대마도(大馬島:쓰시마섬) 왜구들이 본토와의 지원을 모색하는 등 군대로서의 면면을 갖추어 조선을 침탈할 야욕을 보이자 세종은 상왕(태조 이방원)과 뜻을 함께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는데요. 이상한 건 우리가 역사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바 있는 대마도 정벌의 진짜 주인공을 배제한 채 세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유배지인 함길도에서 인연을 쌓은 최윤덕 장군만 부각을 시키고 있네요. 물론 세종이 함길도에 있었던 것도 허구이지만 조선 최초의 대규모 해외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그 주인공마저 부각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자유롭게 펼치고자 했던 극적 상상력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아쉬움이 남네요.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從茂,) 소개합니다. 1360년(고..
[일지매]에서 용이(이준기 분)는 본인 탓에 억울하게 의금부에 잡혀간 친구 대식을 위해 임금을 직접 만나 그 누명을 벗기려고 애를 쓰는데요. 그런데 임금을 만나기 위해 용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신문고(申聞鼓)제도가 아닌 이름도 생소한 격쟁(擊錚)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신문고는 태종(이방원)시절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달았던 북으로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만 세월 흐를수록 본래 취지와는 달리 한양의 관리들 외에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되어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가 영조 47년에 다시 부활하였으므로 인조시대가 배경인 [일지매]에서 신문고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제도..
나장(羅將)은 조선시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으로 나졸(羅卒)이라고도 합니다. 칠반천인(七般賤人)의 하나이며 의금부, 병조, 오위도총부, 사헌부, 사간원, 평시서, 전옥서등에 배속되어, 고급관원의 시종과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습니다. 보통 깔때기를 쓰고 까치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손에는 주장(朱杖:주릿대나 무기 따위로 쓰던 붉은 칠을 한 몽둥이)을 들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칠반천인(七般賤人)이란 조선 시대에 구별하던 일곱 가지 천한 사람으로 - 병과로 구분하자면 조례, 나장, 일수, 조군, 수군, 봉군,역보를 이르며 - 직업으로 구분하자면 노비, 기생, 상여꾼, 혜장(鞋匠:신발 만드는장인), 무당, 백정, 중을 일컫는 말입니다. 드라마에서 시후(박시후 분)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승하하기까지 정조가 개혁하려 했던 거의 모든 국책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에서는 홍국영만 두드러진 채 채제공은 정조의 측근인사 정도로만 묘사가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인 본받을만한 활약을 펼쳤던 채제공(蔡濟恭)을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이며 밥 짓는 연기도 주방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라고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밝..
다른 규수들이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유독 한 규수만이 맨바닥에 앉아있자 그 이유를 물으니 "방석에는 아비의 함자가 쓰여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데요. (당시 각 규수가 준비해간 방석에는 자리 표시를 위해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답니다.) 또한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제각기 바다니 산이니 뻔한 답을 늘어놓았으나 이 중 한 규수가 사람의 인심(人心)이라 하였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왕비간택을 위해 후보감들에게 던진 이러한 질문에 김한구의 딸 김씨가 대답한 일화로 이러한 그녀의 됨됨이에 반해 영조는 김씨를 왕비로 택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조선의 운명을 끝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될 정순왕후(貞純王后,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