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에 앞서 김홍도의 동료이자 스승으로 알려진 김응환(金應煥)에 대해 알아봅니다. 김응환은 영, 정조대에 활동한 화원으로 벼슬은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를 역임했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의 세 조카들을 위시하여 장한종. 이명기는 사위이고 종손 김건종과 김하종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내외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1789년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몰래 일본에 들어가려고 떠났으나 부산에서 병을얻어 4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김홍도는 김응환과는 달리 그의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집안으로 외삼촌과 외조부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결혼 뒤에는 도화서의 김응환에게 그림을 배웠으니 김홍도에게는 불과 3..
어진(御眞)을 담당하는 이를 어진화사(御眞畵師) 또는 어용화사(御容畵師)라고도 하며, 어용, 즉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용 화사는 도화서 화원 중에서 발탁되지만, 화원이 아닌 화가 중에서도 천거하여 함께 시험을 거쳐 선발하는 때도 있는데요. 어용을 제작하는 일 중 어용 화사를 선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로 당대의 화가 중 화상(畵像)에 뛰어난 화가를 대신들이 천거하여 그 중에서 탁월하다고 인정되는 자가 집필(執筆)하였습니다. 어진은 이미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작되어 왔으며, 어진 제작은 원래 임금의 후손들이 보은사상(報恩思想)에 근거한 추모의 정례로부터 행하여졌지만, 나아가서는 조종 및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기에 이처럼..
29일 방영된 SBS "바람의 화원" 9회에서 어진화사 경합의 화제가 실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닌 말로 풀어낸 묘사로 그림을 그려내는 용파(지금의 몽타주)가 주제로 던져진 것에도 김홍도와 신윤복은 그의 눈이 사시임을 깨닫고 결국은 경합에서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를 이기고 당당히 어진화사가 됩니다. 사시로 묘사된 분은 번암 채제공(蔡濟恭)으로 예전에 "이산"에관한 글에서 언급했던 채제공(蔡濟恭)에대해 한번더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과학 르네상스를 이뤄냈던 세종시대, 그 한가운데에는 기생의 아들로 천한 관비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있었습니다. “장영실의 아비는 고려 말 원나라 때 소주(蘇州) 항주(杭州)에서 온 중국 사람이며 어머니는 기생이다.”라고 실록에 전해지는데요. 동래 관비로 있던 1400년 태종이 각 지방의 관찰사들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여 중용을 시키고자 실시한 도천법이라는 제도를 통해 장영실은 궁궐 기술자로 대궐로 들어와 그동안 목말라했던 수많은 선진 기술들을 접하며 갈증을 해소하게 됩니다. 이러한 장영실의 능력을 알고 그의 노비신분을 벗어나게 해준 이가 바로 세종이었으며 장영실은 이런 세종과 조선을 위해 그의 모든 역량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위인전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달..
명나라 때 황제의 정보기관을 창위(廠衛)라 합니다. 창(廠)은 동창(東廠), 서창(西廠), 대내행창(大內行廠)을 말하고, 위(衛)는 금의위(錦衣衛)를 말하는데 이를 합쳐서 창위라 하는 것이죠. 금의위는 동창등의 환관처럼 황제와는 가깝지는 못했기에 창의 세력이 위보다 컸습니다. 금의위는 기본적으로 모든 관료를 정탐했지만 창은 관민과 금의위를 감시했으며, 대내행창은 관민과 창위를 감시했으니 창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창은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의 영을 받아 사건을 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체포하였으며, 형이 지극히 잔혹하여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합니다.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동창(東廠)은 제3대 영락제가 선대왕인 제2대 건문제의 잔당을 색출하고 민정을 살피고자 영락18년(1..
23일 방송된 SBS ‘바람의 화원’ 8회에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를 위한 경합을 위해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초상화 하나를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부리부리한 눈과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표현한 수염 등의 정밀한 묘사와 귀와 목을 포함한 아랫부분이 없는 섬뜩한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이 초상화는 누가 그린 것일까요? 이 초상화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선비화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작품으로 초상화 속의 인물은 바로 윤두서 본인 즉, 자화상입니다. 현재 '윤두서의 자화상(윤두서상)'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국보 24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공재 윤두서는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선도의 종손 윤이석에게 입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
KBS "대왕세종"은 방영초기부터 역사왜곡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배우들의 호연으로 즐겨보는 드라마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난가 역사에서는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 이드라마에서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재해석되어 등장하는 것인데요. 바로 집현전 학자 최만리(崔萬理) 입니다. 먼저 인터넷 백과 사전에서 검색한 최만리에 관한 정보입니다.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의 정7품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 1427년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37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고 1439년 강원도관..
해명태자가 자결한 후 유리왕은 장남인 도절과 둘째 해명, 두 아들을 죽게 만든 잔인한 임금이라는 백성의 원성을 듣게 되고 고구려의 민심은 심한 동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기회 삼아 동부여의 대소는 유리왕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섬기지 않으면 고구려를 침략할 거라 협박을 하자 고구려에는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운은 끝난 게 아니었으니 이 무렵 동부여에서도 대소와 그의 여섯 형제들 간에 내분이 발생하여 유리왕은 동부여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죠. 몇 년후 한나라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려 대소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 수비대의 전략에 말려 대패하고 마는데요. 이 수비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무휼왕자였습니다. 계속된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유리왕은 같은 ..
아래 그림은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檀園風俗圖帖] 입니다. 1745∼1816년(영조 21∼순조 16)에 그린 풍속화로 김홍도가 남긴 유일한 다폭첩(多幅帖)으로 유명합니다. 씨름, 대장간 등과 같이 그림들 대부분이 서민의 일상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으로 보기에도 김홍도 특유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움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기록물로서도 상당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먼저 감상부터 하세요. (상단의 화살표로 그림을 넘겨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천재화가 김홍도가 그린 이 "풍속도첩"을 유심히 살펴보면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바로 신체를 표현할 때 김홍도가 몇가지 큰 실수를 한것입니다. 1. 활쏘기에서 활 쏘는 사..
본론에 앞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거위와 구슬"이라는 설화를 소개합니다. 젊은 시절 한 나그네가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행색이 말이 아닌 까닭에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아래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버렸는데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뜰에 앉아있던 나그네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는데 나그네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