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된 30세의 정약용은 당시 단순한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인었던 화성(수원화성)에 정조의 명으로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라는 명을 받고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동서양의 수많은 서적과 당대 선진적인 실학자들의 경륜을 참고하여 화성축성 개시를 1년여 앞둔 1792년 겨울 계획안을 정조(正祖)에게 올렸습니다. 이 계획안은 모두 5 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로 되어 있는데요.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으며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시설에 대한 설명입니다. ☞ 다음은 정약용 제시한 성설(城說)의 주요 내용입니다. 1. 규모 성의 둘레는 3,600보(약 4..
얼마 전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숙위소(宿衛所)와 장용영(壯勇營)에 대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위(壯勇衛)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포스트는 문답식으로 꾸며봅니다. ☞ 질문 1) 무과를 통해 2,000명의 대규모 인원을 선발한 이유는? 정조는 1785년(정조 9년)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보이던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에서 무려 2,000명을 합격시킵니다. 이는 장헌세자를 추모한다는 뜻도 있겠지마는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함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듬해 2월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난..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왕이 쓰던 물건이나 글씨)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조 때부터 세를 키워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와 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또한,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 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규장각은 정조가 구상하던 개혁정치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는 거대해졌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론세력이 궐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터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이던 규장각에 자신만의 세력을 배치하기엔 그가 처해있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경모궁, 묘(墓)를 영우원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고 정조 9년(1785) 능행(陵幸 : 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단행하는데요. 정조의 능행(陵幸)은 단순한 효(孝)의 의미가 아닌 능행을 통해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또한, 능행이란 형식을 통해 상공업 발달로 사회 변동이 활발하던 수도권을 직접 방문, 사대부와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먼저 과거시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문·무 양과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문과를 중시하였는데 문과에는 생원·진사과 및 잡과로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습니다. 생원·진사과는 소과라 하여 15세 이상인 자가 응시할 수 있었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과 입학자격을 주고 하급관리로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 관리가 되려면 대과에 응시해야 했는데 대과에는 성균관 출신과 소과 합격생이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7년 의빈성씨가 낳은 문효세자의 세자책봉을 기념하는 과거시험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됩니다. (하지만 [이산]에서는 정약용이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의빈성씨는 회임조차 하지 않네요.)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과제에서는 매번 장원 또는 그에 버금가는..
조선시대에는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4차례 있었는데요. 국사시간에 귀가 아프게 들은 바 있는 바로 "4대 박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정조 다음에 왕이 된 순조~고종 때까지의 4차례에 걸친 천주교탄압을 통칭하는 말이니 정조와 천주교 탄압은 무관한 듯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 참고. 4대 박해 요약 -1801년의 신유박해 - 순조 -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약 100명이 처형)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와 그 와 관련된 천주교인 9명이 순교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