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사계절 산해진미를 먹고 온종일 어의와 궁녀들에 둘러싸여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천수를 누려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사인은 고혈압, 당뇨병, 중풍 등이 일반적이었지만 재위 기간 내내 괴롭힌 질병은 바로 종기였습니다. 종기로 고생한 왕들은 세종, 세조, 현종 등으로 종기 때문에 몇 개월간 문밖출입을 못하고 누워 지낸 경우도 허다하고 심지어 이 일로 인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지 못해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역대 왕들이 온천을 자주 찾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데 이런 온천행에도 많은 제약이 있어 종기가 생겨 온천을 가려고 해도 왕의 어가 행렬이 민폐를 끼친다고 신하들이 만류하면 갈 수 없었고 가뭄, 홍수 등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있..
전하(殿下)는 왕을 높여 부르는 말로 왕보다 낮은 사람들이 왕을 부를 때 쓰던 명칭입니다. 반대로 왕보다 높은 상왕(上王)이나, 삼전 어른들(대왕대비,왕대비,대비)은 왕에게 주상(主上)이라 부릅니다. 전하(殿下)라는 호칭은 왕비에게도 적용됩니다만 조선시대에는 여왕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으로 잘못알고있습니다. 또한, 전하(殿下)는 별로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닙니다. 왕을 칭할때 황제의 나라에서는 폐하(陛下) , 제후국(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전하(殿下)라고 했으니 말이죠. 우리 나라는 고려시대까지는 임금을 폐하(陛下)라고 했지만, 중국에 조공을 바치게 된 이후 폐하(陛下)를 쓰지 못하고 전하(殿下)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저하(邸下)는 왕세자(王世子) 또는 왕세손(王世孫)을 ..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사계절 산해진미를 먹고 온종일 어의와 궁녀들에 둘러싸여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천수를 누려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사인은 고혈압, 당뇨병, 중풍 등이 일반적이었지만 재위 기간 내내 괴롭힌 질병은 바로 종기였습니다. 종기로 고생한 왕들은 세종, 세조, 현종 등으로 종기 때문에 몇 개월간 문밖출입을 못하고 누워 지낸 경우도 허다하고 심지어 이 일로 인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지 못해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역대 왕들이 온천을 자주 찾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데 이런 온천행에도 많은 제약이 있어 종기가 생겨 온천을 가려고 해도 왕의 어가 행렬이 민폐를 끼친다고 신하들이 만류하면 갈 수 없었고 가뭄, 홍수 등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있..
본론에 앞서 김홍도의 동료이자 스승으로 알려진 김응환(金應煥)에 대해 알아봅니다. 김응환은 영, 정조대에 활동한 화원으로 벼슬은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를 역임했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의 세 조카들을 위시하여 장한종. 이명기는 사위이고 종손 김건종과 김하종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내외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1789년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몰래 일본에 들어가려고 떠났으나 부산에서 병을얻어 4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김홍도는 김응환과는 달리 그의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집안으로 외삼촌과 외조부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결혼 뒤에는 도화서의 김응환에게 그림을 배웠으니 김홍도에게는 불과 3..
[일지매]에서 용이(이준기 분)는 본인 탓에 억울하게 의금부에 잡혀간 친구 대식을 위해 임금을 직접 만나 그 누명을 벗기려고 애를 쓰는데요. 그런데 임금을 만나기 위해 용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신문고(申聞鼓)제도가 아닌 이름도 생소한 격쟁(擊錚)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신문고는 태종(이방원)시절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달았던 북으로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만 세월 흐를수록 본래 취지와는 달리 한양의 관리들 외에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되어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가 영조 47년에 다시 부활하였으므로 인조시대가 배경인 [일지매]에서 신문고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제도..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승하하기까지 정조가 개혁하려 했던 거의 모든 국책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에서는 홍국영만 두드러진 채 채제공은 정조의 측근인사 정도로만 묘사가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인 본받을만한 활약을 펼쳤던 채제공(蔡濟恭)을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이며 밥 짓는 연기도 주방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라고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밝..
다른 규수들이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유독 한 규수만이 맨바닥에 앉아있자 그 이유를 물으니 "방석에는 아비의 함자가 쓰여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데요. (당시 각 규수가 준비해간 방석에는 자리 표시를 위해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답니다.) 또한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제각기 바다니 산이니 뻔한 답을 늘어놓았으나 이 중 한 규수가 사람의 인심(人心)이라 하였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왕비간택을 위해 후보감들에게 던진 이러한 질문에 김한구의 딸 김씨가 대답한 일화로 이러한 그녀의 됨됨이에 반해 영조는 김씨를 왕비로 택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조선의 운명을 끝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될 정순왕후(貞純王后, 1..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노론 세력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는데요. 그가 보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안위는 그다지 안전치 못하여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둘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정조의 가족들 또한 그 위협의 사정권 안에 들었던 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른 왕조에 비해 정조 또는 그의 가족이 사망한 후 유독 독살설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중 널리 알려진 것이 정조 독살설인데요. 정조가 승하할 당시 정순황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독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도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지병악화로 인한 사망설이 지배적이기도 합니다. ☞ 문효세자의 죽음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노론세력의 견제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계획하고 행했던 모든 개..
얼마 전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숙위소(宿衛所)와 장용영(壯勇營)에 대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위(壯勇衛)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포스트는 문답식으로 꾸며봅니다. ☞ 질문 1) 무과를 통해 2,000명의 대규모 인원을 선발한 이유는? 정조는 1785년(정조 9년)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보이던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에서 무려 2,000명을 합격시킵니다. 이는 장헌세자를 추모한다는 뜻도 있겠지마는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함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듬해 2월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난..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왕이 쓰던 물건이나 글씨)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조 때부터 세를 키워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와 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또한,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 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규장각은 정조가 구상하던 개혁정치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는 거대해졌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론세력이 궐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터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이던 규장각에 자신만의 세력을 배치하기엔 그가 처해있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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