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년(세종 3년) 상의원에 근무하던 장영실은 세종의 명으로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발탁됩니다. 명으로 떠나는 장영실에게 세종은 중국의 물시계와 황실 천문대인 흠천감에 설치된 천문기구인 혼천의를 보고 도면을 그려오라는 중요한 소임을 맡기게 됩니다. ☞상의원(尙衣院]) 조선 시대에,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당시 중국은 아라비아와 함께 천문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였는데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방침으로 했던 조선은 매년 11월 중국에 동지사를 보내 역서를 받아 그것을 그대로 조선의 책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드라마에서처럼 일식이 시작되는 시간이 맞지 않아 임금들이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사대교린(事大..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驪興:지금의 여주 부근))이며 여흥부원군(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습니다. 1382년(고려 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이방원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세제로 책봉되면서 세제 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보다 두 살 많은 연상으로 태종이 험난한 역경을 겪으며 왕이 되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1398년 "제 1차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의 기습공격을 예상하고 태조(이성계)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
효령대군은 태종(이방원)의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글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활쏘기에 특히 능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아 사냥터에 항상 따라 다녔던 부분은 현재 드라마에 나오는 효령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두터운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으나 양녕의 카리스마적 기질과 충녕이 가진 성군의 자질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개국 초기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으로 동요하는 백성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유ㆍ불 조화론을 주장하였고, 불서 번역과 사찰 보수 등 불교 정신에 입각한 보국안민(輔國安民)에 힘쓰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을때 효령은 ..
평도전 드라마 초반에서 왜인 첩자로 처음등장했지만 실제 첩자는 아니고 태종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사람으로1407년 궁중에 진상되는 고기, 소금등을 관장하는 사재감(司宰監)의 원외사재소감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뒤에 정3품인 상호군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또는,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의 명으로 조선에 들어와 관직을 재수받고 일을 배우던 인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평도전은 왜선(倭船)을 만들어 한강에서 조선 병선과 그 속력의 빠르기를 비교해 보이기도 하고, 대마도를 오가며 조선국왕의 의중을 전하고 대마도주의 답변을 받아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도전입장에서는 동족인 왜구를 섬멸하는 일에 적극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평도전에게는 아들 평망고(..
[대왕세종]에서 미개한 해적무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대마도(大馬島:쓰시마섬) 왜구들이 본토와의 지원을 모색하는 등 군대로서의 면면을 갖추어 조선을 침탈할 야욕을 보이자 세종은 상왕(태조 이방원)과 뜻을 함께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는데요. 이상한 건 우리가 역사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바 있는 대마도 정벌의 진짜 주인공을 배제한 채 세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유배지인 함길도에서 인연을 쌓은 최윤덕 장군만 부각을 시키고 있네요. 물론 세종이 함길도에 있었던 것도 허구이지만 조선 최초의 대규모 해외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그 주인공마저 부각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자유롭게 펼치고자 했던 극적 상상력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아쉬움이 남네요.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從茂,) 소개합니다. 1360년(고..
[대왕 세종]에서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기 위한 태종(이방원)의 계획에 결국 장인인 심온(沈溫)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데요. 태종의 명을 받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박은과 조말생은 심온의 딸이자 왕비인 소헌왕후를 그대로 두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기에 역적의 여식이니 폐위를 내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과연 소헌왕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내명부를 가장 잘 운영했던 최고의 왕비였습니다. 처음부터 왕비가 되기 위한 간택령을 통해 입궐했던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에게 시집온 후 첫째인 양녕이 폐세자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셋째인 충녕이 왕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모가 되는 운명를 가지게 됩..
태종은 즉위한 지 18년 8개월 만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세종이 장성할 때까지 나랏일을 직접 처리했는데 내정은 세종에게 일부분 일임하였으나 군권(軍權)만은 내어주질 않았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태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처남들(민씨 4형제)의 목숨까지도 제물로 삼았던 인물이지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로서 왕이 된 아들의 탄탄치 못할 것만 같은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충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배후에서 큰 공을 세운 장인인 심온과 강상인, 류정현, 윤회등의 권력남용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중 태종의 경계 대상 1호는 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었습니다. 심온은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11살의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는 등 그야..
태종 4년 11살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 후 숨을 거두기까지 수많은 기행을 일삼았는데요. 이 수많은 기행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복잡한 여자관계였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상왕의 첩 초궁장을 건드려 문제가 되었지만 상왕의 기생인 줄 몰랐다는 양녕의 변명이 통하여 위기를 모면했죠.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곽선의 첩 어리와의 스캔들로 인해 양녕은 결국 폐세자가 되고 맙니다. 기생의 신분이었던 초궁장과는 달리 어리는 유부녀의 신분이었기에 세자의 신분으로 감행된 유부녀와의 간통은 왕실의 자존심을 땅에 떨어뜨리는 큰 죄임에 분명했던 것입니다. 양녕은 곽선의 양자를 위협해서 어리를 납치하려 했었는데 김한로(양녕의 장인)가 이사실을 알고도 양녕을 자중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여색을 탐하는데..
먼저 충녕대군은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경성에 유배된 적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드라마에서 역사에도 없는 기발한 설정을 하게 된 이유는 첫째, 양녕이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해서고 둘째, 세종시절 가장 신임받았던 두 인물과의 처음 만남을 풀어내기 위한 작가의 미봉책인 듯싶네요. 충녕이 함길도 경성에서 만난 최윤덕(崔潤德)과 이천(李蕆,)을 소개합니다. ☞ 무관 출신이 정승이 되다. 축성(築城)대감 최윤덕(崔潤德) 고려말~조선 초의 명장 최운해(崔雲海)의 아들인 최윤덕은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고려의 천민 계급, 후에 백정으로 불려짐)에 의하여 양육됐습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사용한 최윤덕은 소에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태종(이방원)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최명길 분)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말~조선 초의 충신 민제의 딸로 양녕,충녕을 포함한 4남 4녀를 두었습니다. 태종보다 2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태종이 집권하는데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으나 왕비가 된 이후에는 두 사람사이에 불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외척인 민씨일가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대해 병적으로 보일 만큼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심기를 흔들었는데 이즈음 태종은 세자인 양녕에게 왕위를 넘길 뜻을 표명하는데 바로 1차 선위 파동이었습니다. ☞ 민무구,무질 옥 1차 선위 파동을 계기로 민씨 형제의 교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외척 세력으로서 원경왕후와 양녕의 후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