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성송연(한지민 분)이 나중에 의빈(창녕성씨)이 된다는 설정이라면 정답은 NO 입니다. * 참고로 성송연은 의빈(창녕성씨)의 본명이 아닌 드라마에서 지어낸 이름이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계속 성송연이라 칭하겠습니다. 일단 원빈(풍산홍씨)에 관해 언급했던 포스트에서 처럼 정조의 가계도를 먼저 보며 시작하겠습니다. 정비 효의왕후 청풍김씨 ( 자녀없음 ) 제1후궁 원빈 풍산홍씨 ( 자녀없음 ) => 홍국영의 누이 제2후궁 화빈 파평윤씨 - 서1녀 옹주 제3후궁 의빈 창녕성씨 - 서1남 문효세자, 서2녀 옹주 제4후궁 수빈 반남박씨 - 서2남 순조, 서3녀 숙선옹주 다시 얘기하지만 성송연이 의빈(창녕성씨)이 된다면 정조의 두번째 후궁이 아니라 세번째 후궁입니다. 또한 두번째후궁인 화빈(파평윤씨와) 밀접한 ..
얼마 전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숙위소(宿衛所)와 장용영(壯勇營)에 대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위(壯勇衛)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포스트는 문답식으로 꾸며봅니다. ☞ 질문 1) 무과를 통해 2,000명의 대규모 인원을 선발한 이유는? 정조는 1785년(정조 9년)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보이던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에서 무려 2,000명을 합격시킵니다. 이는 장헌세자를 추모한다는 뜻도 있겠지마는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함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듬해 2월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난..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왕이 쓰던 물건이나 글씨)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조 때부터 세를 키워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와 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또한,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 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규장각은 정조가 구상하던 개혁정치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는 거대해졌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론세력이 궐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터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이던 규장각에 자신만의 세력을 배치하기엔 그가 처해있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
얼마전 화빈이 정조의 세번째 후궁이 아닌 사실은 화빈 윤씨에 관한 글을 통해 드라마 [이산]의 시간적 오류를 바로 잡은 바 있는데요. 5/20 방영분에서는 아예 화빈과 송연이(후에 의빈성씨)의 출산일을 같은날로 묘사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물론 드라마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겠지만 두 사람 다 실제 인물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설정은 자칫 사극의 특수성으로 인해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어 두사람의 출산일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화빈 파평 윤씨는 정조 4년에 두번째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며 이듬해(정조 5년) 딸을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옹주가 일찍 죽은 이후로는 소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소생이 일찍 죽어 왕실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는 이름이 오르지 못한 화빈은 순조 24년 1월 ..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예를 따라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종4품)·소원(昭媛:정4품)·숙용(淑容:종3품)·소용(昭容:정3품)·숙의(淑儀:종2품)·소의(昭儀:정2품)·귀인(貴人:종1품)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嬪:정1품)이라 하였습니다. 이 빈(嬪)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소용·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원빈이나 화빈과는 달리 송연이가 승은을 입고서도 내명부의 벼슬을 받지 못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장희빈(張禧嬪) 등을 포함하여 역대 빈..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경모궁, 묘(墓)를 영우원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고 정조 9년(1785) 능행(陵幸 : 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단행하는데요. 정조의 능행(陵幸)은 단순한 효(孝)의 의미가 아닌 능행을 통해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또한, 능행이란 형식을 통해 상공업 발달로 사회 변동이 활발하던 수도권을 직접 방문, 사대부와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제가 쓴 드라마 이산에 관한 포스트를 읽으신 분이라면 다들 아실 테지만 어제 처음 등장한 화빈 윤씨는 원빈 과 송연이(의빈 성씨)에 이어 간택된 정조의 세번째 후궁이 아닙니다. 원빈과 의빈 성씨에 관한 포스트에 이어 정조의 가계도를 다시 보며 화빈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정비 효의왕후 청풍김씨 ( 자녀없음 ) 제1후궁 원빈 풍산홍씨 ( 자녀없음 ) => 홍국영의 누이 제2후궁 화빈 파평윤씨 - 서1녀 옹주 제3후궁 의빈 창녕성씨 - 서1남 문효세자, 서2녀 옹주 제4후궁 수빈 반남박씨 - 서2남 순조, 서3녀 숙선옹주 남원윤씨 좌찬성 윤창윤의 딸로 영조 41년에 태어난 그녀는 원빈이 갑작스레 사망한 후 1년 뒤인 정조 4년에 두번째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며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옹주가 일찍..
먼저 과거시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문·무 양과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문과를 중시하였는데 문과에는 생원·진사과 및 잡과로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습니다. 생원·진사과는 소과라 하여 15세 이상인 자가 응시할 수 있었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과 입학자격을 주고 하급관리로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 관리가 되려면 대과에 응시해야 했는데 대과에는 성균관 출신과 소과 합격생이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7년 의빈성씨가 낳은 문효세자의 세자책봉을 기념하는 과거시험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됩니다. (하지만 [이산]에서는 정약용이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의빈성씨는 회임조차 하지 않네요.)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과제에서는 매번 장원 또는 그에 버금가는..
드라마 "이산"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박은혜 분)를 대신해 홍국영의 누이 원빈이 후궁으로 입궁했는데요. 어제부터 효의왕후(박은혜 분)와 원빈과의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어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습니다. 바로 성송연(한지민 분)에 대한 원빈의 질투가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실제 역사자료에 원빈은 어떻게 서술되었을까요? 일단 원빈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정조의 가계도를 먼저 보여드릴게요. 정비 효의왕후 청풍김씨 ( 자녀없음 ) 제1후궁 원빈 풍산홍씨 ( 자녀없음 ) 제2후궁 화빈 파평윤씨 - 서1녀 옹주 제3후궁 의빈 창녕성씨 - 서1남 문효세자, 서2녀 옹주 제4후궁 수빈 반남박씨 - 서2남 순조, 서3녀 숙선옹주 위처럼 후사가 없는 정비 효의왕후(박은혜 분)를 이어 후궁으로 들어온 홍국영의..
어느 가을 좌참찬 김시묵의 집에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미 져버린 마당의 꽃들이 다시 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천사표 여인 효의왕후가 태어날 징조였던 것입니다. 먼저 어렸을 때부터 온화하고 덕스러움이 몸에 배어있던 그녀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린시절 어느날 아이들과 같이 놀았는데,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에게 책망하기를 ‘풀이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왜 뽑아 한창 자라나는 생기(生氣)를 해치느냐?’라고 하였다. 생물에 미친 사랑과 사람을 가르치는 정성이 어렸을 때부터 이와 같았으므로, 그 광경을 보고 그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이런 그녀의 평판은 궁궐까지 들어가게 되어 영조 37년(1761)에 아홉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