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은 태종(이방원)의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글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활쏘기에 특히 능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아 사냥터에 항상 따라 다녔던 부분은 현재 드라마에 나오는 효령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두터운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으나 양녕의 카리스마적 기질과 충녕이 가진 성군의 자질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개국 초기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으로 동요하는 백성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유ㆍ불 조화론을 주장하였고, 불서 번역과 사찰 보수 등 불교 정신에 입각한 보국안민(輔國安民)에 힘쓰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을때 효령은 ..
어제 방영된 "SBS 일지매" 12회에는 병판 변식대감과 청나라 역관이 독대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복장으로 봐선 청나라인이 분명한 듯 보이나 사실 이 사람은 조선사람입니다. 매국노 정명수(鄭命壽)를 소개합니다. 평안도 은산(殷山)출신으로 관노(官奴)였던 정명수(鄭命壽)는 원래부터 성품이 교활하였다 합니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나중에 청나라)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에게 1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는데 이때 정명수(鄭命壽)도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습니다. 1629년(인조 7)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간 강홍립의 군대는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해 후금에 항복할 때 포로가 되는데요...
화려한 볼거리로 사랑은 받는 "SBS 일지매"는 출생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된 일지매(이준기 분)의 복수와 은채(한효주 분)와의 애정라인이 동시에 진행되어 시청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물론 빠른 전개와 출연진들의 흠잡을 때 없는 연기력은 타 방송사의 드라마와의 시청률경쟁에서 충분히 앞서나갈 수 있는 점이 존재하지만 이미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로부터 답습한듯한 뻔한소재와 줄거리는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1. 사랑하는 여인... 알고 보면? 미천한 또는 혼란스런 성장기를 견뎌가며 세상을 향해 이를 악물고 세상을향해 복수하겠다던 주인공의 다짐은 몇 번씩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바로 사랑하는 여인 때문인데요. 문제는 사랑하는 이가 알고 보면 원수의 집안이란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쾌도..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윤건과 나얼이 재결합해서 5년 만에 발표한 "브라운아이즈 3집"을 소개합니다. R&B의 대명사로 불리며 해체 당시 수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만큼 재결합소식이 전해진 후 그들의 음반발표를 손꼽아 기다리던 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않는 또 하나의 명반이 탄생한 듯싶네요. 먼저 타이틀 곡인 "가지마 가지마"는 "벌써 1년"과 같은 미디움 템포로 그들 특유의 음색과 풍부한 사운드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또한 직설적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 또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앨범을 감상하며 가장 놀랐던 건 그들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장르를 두 곡에서 선보이는데요. 먼저 'Like a flame'은 일렉트로닉 하우스에 ..
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를 직계(直系),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방계(傍系)라고 하는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이른바 방계승통으로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본인에게는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죠.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중신들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 받게 됩니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그의 지지파인 대북파가 앞장서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의 왕족과 그들을 지원하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켜버립니다. 이 사건으..
어제 방영된 "최강칠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낮에는 최하층 관리 나장으로, 밤에는 카리스마 있는 자객으로 이중생활을 하는 최칠우의 모험담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문정혁'의 입대 전 마직막 작품으로 알려져 더 주목을 받은 "최강칠우"는 기존의 사극과는 조금은 색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첫 방송을 무난하게 마무리하였으나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 연기자들의 대사처리는 좀 더 개선되어야 할듯싶네요. 이상한 건 "최강칠우"를 보면서 자꾸 "SBS 일지매"가 생각이 나는 것인데요. 결정적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된 여동생 우영이의 죽음에 칠우가 눈가리개를 하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달빛 아래서 긴 채찍을 휘두르며 마치 쾌걸 조로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장면에서는 일지매와 최강칠우의 모습이 교차하기까지 했습니다. ..
평도전 드라마 초반에서 왜인 첩자로 처음등장했지만 실제 첩자는 아니고 태종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사람으로1407년 궁중에 진상되는 고기, 소금등을 관장하는 사재감(司宰監)의 원외사재소감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뒤에 정3품인 상호군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또는,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의 명으로 조선에 들어와 관직을 재수받고 일을 배우던 인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평도전은 왜선(倭船)을 만들어 한강에서 조선 병선과 그 속력의 빠르기를 비교해 보이기도 하고, 대마도를 오가며 조선국왕의 의중을 전하고 대마도주의 답변을 받아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도전입장에서는 동족인 왜구를 섬멸하는 일에 적극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평도전에게는 아들 평망고(..
[대왕세종]에서 미개한 해적무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대마도(大馬島:쓰시마섬) 왜구들이 본토와의 지원을 모색하는 등 군대로서의 면면을 갖추어 조선을 침탈할 야욕을 보이자 세종은 상왕(태조 이방원)과 뜻을 함께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는데요. 이상한 건 우리가 역사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바 있는 대마도 정벌의 진짜 주인공을 배제한 채 세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유배지인 함길도에서 인연을 쌓은 최윤덕 장군만 부각을 시키고 있네요. 물론 세종이 함길도에 있었던 것도 허구이지만 조선 최초의 대규모 해외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그 주인공마저 부각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자유롭게 펼치고자 했던 극적 상상력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아쉬움이 남네요.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從茂,) 소개합니다. 1360년(고..
[일지매]에서 용이(이준기 분)는 본인 탓에 억울하게 의금부에 잡혀간 친구 대식을 위해 임금을 직접 만나 그 누명을 벗기려고 애를 쓰는데요. 그런데 임금을 만나기 위해 용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신문고(申聞鼓)제도가 아닌 이름도 생소한 격쟁(擊錚)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신문고는 태종(이방원)시절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달았던 북으로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만 세월 흐를수록 본래 취지와는 달리 한양의 관리들 외에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되어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가 영조 47년에 다시 부활하였으므로 인조시대가 배경인 [일지매]에서 신문고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제도..
나장(羅將)은 조선시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으로 나졸(羅卒)이라고도 합니다. 칠반천인(七般賤人)의 하나이며 의금부, 병조, 오위도총부, 사헌부, 사간원, 평시서, 전옥서등에 배속되어, 고급관원의 시종과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습니다. 보통 깔때기를 쓰고 까치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손에는 주장(朱杖:주릿대나 무기 따위로 쓰던 붉은 칠을 한 몽둥이)을 들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칠반천인(七般賤人)이란 조선 시대에 구별하던 일곱 가지 천한 사람으로 - 병과로 구분하자면 조례, 나장, 일수, 조군, 수군, 봉군,역보를 이르며 - 직업으로 구분하자면 노비, 기생, 상여꾼, 혜장(鞋匠:신발 만드는장인), 무당, 백정, 중을 일컫는 말입니다. 드라마에서 시후(박시후 분)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승하하기까지 정조가 개혁하려 했던 거의 모든 국책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에서는 홍국영만 두드러진 채 채제공은 정조의 측근인사 정도로만 묘사가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인 본받을만한 활약을 펼쳤던 채제공(蔡濟恭)을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이며 밥 짓는 연기도 주방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라고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밝..
다른 규수들이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유독 한 규수만이 맨바닥에 앉아있자 그 이유를 물으니 "방석에는 아비의 함자가 쓰여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데요. (당시 각 규수가 준비해간 방석에는 자리 표시를 위해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답니다.) 또한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제각기 바다니 산이니 뻔한 답을 늘어놓았으나 이 중 한 규수가 사람의 인심(人心)이라 하였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왕비간택을 위해 후보감들에게 던진 이러한 질문에 김한구의 딸 김씨가 대답한 일화로 이러한 그녀의 됨됨이에 반해 영조는 김씨를 왕비로 택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조선의 운명을 끝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될 정순왕후(貞純王后, 1..
드라마 [일지매]에서 좌의정 심기원은 우연히 일지매의 아버지인 이원호의 죽음이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된 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일지매를 만나 이원호의 억울함을 얘기하기도 전에 역모죄로 잡히고 마는데요. 4회까지 방영되는 동안 유일하게 실존인물로 등장하는 심기원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공신인 심기원(沈器遠,1587~1644)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 김자점, 최명길등과 함께 1등 공신에 녹훈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으로 등용되어 동부승지 ·병조참판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던 심기원은 이괄(李适)의 난 때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서 진압군을 지휘하고, 정묘호란 때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세자를 수행하였으..
[이산]에서 정순왕후는 정조가 영조로 부터 물려받은 금등문서의 정체를 알고 이를 찾아내기위해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보습을 보이는데요. 이 금등문서엔 이산이 찾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자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좌가 들어 있었는데 자신의 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던 영조는 체제공(한인수 분)에게 이 금등(金燈)은 나중에 세손이 위기에 처할때 써야 할지 모른다며 전달해줍니다. 훗날, 정조의 히든카드가 될 금등(金燈)은 실제 존재했었을까요? 1. 금등(金燈)은 무엇인가? 금등문서. 금등문건으로도 불리며 조선 시대에, 붉게 칠한 장대 끝에 도금한 등자를 거꾸로 붙인 의장(儀仗)으로 모두 나무로 만들었는데 대와 맞닿는 등자 부분만은 쇠로 만들기도 함. 2. 영조는 왜 금등(金燈)을 채제공(蔡濟恭)에..
[이산]에서는 셋째 아이를 가진 의빈성씨가 장결병(간경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실제로는 셋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거나 그 직전에 사망한 것으로 실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노론 세력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는데요. 그가 보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안위는 그다지 안전치 못하여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둘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정조의 가족들 또한 그 위협의 사정권 안에 들었던 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른 왕조에 비해 정조 또는 그의 가족이 사망한 후 유독 독살설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중 널리 알려진 것이 정조 독살설인데요. 정조가 승하할 당시 정순황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독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도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지병악화로 인한 사망설이 지배적이기도 합니다. ☞ 문효세자의 죽음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노론세력의 견제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계획하고 행했던 모든 개..
[대왕 세종]에서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기 위한 태종(이방원)의 계획에 결국 장인인 심온(沈溫)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데요. 태종의 명을 받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박은과 조말생은 심온의 딸이자 왕비인 소헌왕후를 그대로 두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기에 역적의 여식이니 폐위를 내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과연 소헌왕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내명부를 가장 잘 운영했던 최고의 왕비였습니다. 처음부터 왕비가 되기 위한 간택령을 통해 입궐했던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에게 시집온 후 첫째인 양녕이 폐세자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셋째인 충녕이 왕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모가 되는 운명를 가지게 됩..
드라마 [일지매]는 두번에 걸친 임진왜란과 반정, 반란 등으로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경제상태가 악화됐던 조선 인조 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일지매의 아버지인 이원호(조민기분) 또한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막상 보위에 오른 인조의 정치에 불만을 갖게 되는데요. 그와 같이 반정에 참여했던 심기원 등의 무리는 이를 눈치 채고 이원호에게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죄를 씌워 죽임을 당하게 하죠. (여기서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설정이 있는데 바로 이원호를 칼로 베어버린 극 중에서 형제 아니면 혈육으로 묘사된 흰도포(김창완 분)가 아마도 인조인 것 같은 설정이 그저 놀라울 뿐이네요.) 인조반정 : 광해군의 패륜을 단죄키위해 김자점, 심기원, 이귀들이 주축이 되어 능양..
179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된 30세의 정약용은 당시 단순한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인었던 화성(수원화성)에 정조의 명으로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라는 명을 받고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동서양의 수많은 서적과 당대 선진적인 실학자들의 경륜을 참고하여 화성축성 개시를 1년여 앞둔 1792년 겨울 계획안을 정조(正祖)에게 올렸습니다. 이 계획안은 모두 5 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로 되어 있는데요.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으며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시설에 대한 설명입니다. ☞ 다음은 정약용 제시한 성설(城說)의 주요 내용입니다. 1. 규모 성의 둘레는 3,600보(약 4..
의빈성씨에 관한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산]에서도 결국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는군요. 정비인 효의왕후 이래 두 명의 후궁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던 정조가 그의 정인 의빈성씨에게서 나온 문효세자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는 [이산]에서도 잘 묘사되었는데요. 과연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은 정조의 슬픔은 어느 정도였는지 실록을 통해 알려드립니다. ☞ 정조 10년(1786) 윤7월 19일(경인) - 문효 세자를 장사지내다.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餞別)하였다. 다시 홍화문 안의 악차(幄次)로 돌아와서 영여(靈輿)가 도성 밖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흑립(黑笠)과 백포 첩리(白布帖裏)를 다시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