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매]에서 용이(이준기 분)는 본인 탓에 억울하게 의금부에 잡혀간 친구 대식을 위해 임금을 직접 만나 그 누명을 벗기려고 애를 쓰는데요. 그런데 임금을 만나기 위해 용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신문고(申聞鼓)제도가 아닌 이름도 생소한 격쟁(擊錚)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신문고는 태종(이방원)시절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달았던 북으로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만 세월 흐를수록 본래 취지와는 달리 한양의 관리들 외에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되어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가 영조 47년에 다시 부활하였으므로 인조시대가 배경인 [일지매]에서 신문고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제도..
나장(羅將)은 조선시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으로 나졸(羅卒)이라고도 합니다. 칠반천인(七般賤人)의 하나이며 의금부, 병조, 오위도총부, 사헌부, 사간원, 평시서, 전옥서등에 배속되어, 고급관원의 시종과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습니다. 보통 깔때기를 쓰고 까치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손에는 주장(朱杖:주릿대나 무기 따위로 쓰던 붉은 칠을 한 몽둥이)을 들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칠반천인(七般賤人)이란 조선 시대에 구별하던 일곱 가지 천한 사람으로 - 병과로 구분하자면 조례, 나장, 일수, 조군, 수군, 봉군,역보를 이르며 - 직업으로 구분하자면 노비, 기생, 상여꾼, 혜장(鞋匠:신발 만드는장인), 무당, 백정, 중을 일컫는 말입니다. 드라마에서 시후(박시후 분)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승하하기까지 정조가 개혁하려 했던 거의 모든 국책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드라마에서는 홍국영만 두드러진 채 채제공은 정조의 측근인사 정도로만 묘사가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인 본받을만한 활약을 펼쳤던 채제공(蔡濟恭)을 소개합니다. 1720년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3세에 과거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냈으나 워낙 청렴했던 탓에 ‘전해오는 재산이라고는 오직 네 벽만 있는 집뿐이며 밥 짓는 연기도 주방에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라고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서 밝..
다른 규수들이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유독 한 규수만이 맨바닥에 앉아있자 그 이유를 물으니 "방석에는 아비의 함자가 쓰여있어 차마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데요. (당시 각 규수가 준비해간 방석에는 자리 표시를 위해 아비의 이름을 수놓았답니다.) 또한 "세상에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제각기 바다니 산이니 뻔한 답을 늘어놓았으나 이 중 한 규수가 사람의 인심(人心)이라 하였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왕비간택을 위해 후보감들에게 던진 이러한 질문에 김한구의 딸 김씨가 대답한 일화로 이러한 그녀의 됨됨이에 반해 영조는 김씨를 왕비로 택하게 되는데요.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조선의 운명을 끝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될 정순왕후(貞純王后, 1..
드라마 [일지매]에서 좌의정 심기원은 우연히 일지매의 아버지인 이원호의 죽음이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된 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일지매를 만나 이원호의 억울함을 얘기하기도 전에 역모죄로 잡히고 마는데요. 4회까지 방영되는 동안 유일하게 실존인물로 등장하는 심기원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공신인 심기원(沈器遠,1587~1644)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 김자점, 최명길등과 함께 1등 공신에 녹훈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으로 등용되어 동부승지 ·병조참판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던 심기원은 이괄(李适)의 난 때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서 진압군을 지휘하고, 정묘호란 때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세자를 수행하였으..
[이산]에서 정순왕후는 정조가 영조로 부터 물려받은 금등문서의 정체를 알고 이를 찾아내기위해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보습을 보이는데요. 이 금등문서엔 이산이 찾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자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좌가 들어 있었는데 자신의 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던 영조는 체제공(한인수 분)에게 이 금등(金燈)은 나중에 세손이 위기에 처할때 써야 할지 모른다며 전달해줍니다. 훗날, 정조의 히든카드가 될 금등(金燈)은 실제 존재했었을까요? 1. 금등(金燈)은 무엇인가? 금등문서. 금등문건으로도 불리며 조선 시대에, 붉게 칠한 장대 끝에 도금한 등자를 거꾸로 붙인 의장(儀仗)으로 모두 나무로 만들었는데 대와 맞닿는 등자 부분만은 쇠로 만들기도 함. 2. 영조는 왜 금등(金燈)을 채제공(蔡濟恭)에..
[이산]에서는 셋째 아이를 가진 의빈성씨가 장결병(간경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실제로는 셋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거나 그 직전에 사망한 것으로 실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노론 세력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는데요. 그가 보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안위는 그다지 안전치 못하여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둘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정조의 가족들 또한 그 위협의 사정권 안에 들었던 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른 왕조에 비해 정조 또는 그의 가족이 사망한 후 유독 독살설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중 널리 알려진 것이 정조 독살설인데요. 정조가 승하할 당시 정순황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독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도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지병악화로 인한 사망설이 지배적이기도 합니다. ☞ 문효세자의 죽음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노론세력의 견제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계획하고 행했던 모든 개..
[대왕 세종]에서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기 위한 태종(이방원)의 계획에 결국 장인인 심온(沈溫)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데요. 태종의 명을 받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박은과 조말생은 심온의 딸이자 왕비인 소헌왕후를 그대로 두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기에 역적의 여식이니 폐위를 내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과연 소헌왕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내명부를 가장 잘 운영했던 최고의 왕비였습니다. 처음부터 왕비가 되기 위한 간택령을 통해 입궐했던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에게 시집온 후 첫째인 양녕이 폐세자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셋째인 충녕이 왕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모가 되는 운명를 가지게 됩..
드라마 [일지매]는 두번에 걸친 임진왜란과 반정, 반란 등으로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경제상태가 악화됐던 조선 인조 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일지매의 아버지인 이원호(조민기분) 또한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막상 보위에 오른 인조의 정치에 불만을 갖게 되는데요. 그와 같이 반정에 참여했던 심기원 등의 무리는 이를 눈치 채고 이원호에게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죄를 씌워 죽임을 당하게 하죠. (여기서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설정이 있는데 바로 이원호를 칼로 베어버린 극 중에서 형제 아니면 혈육으로 묘사된 흰도포(김창완 분)가 아마도 인조인 것 같은 설정이 그저 놀라울 뿐이네요.) 인조반정 : 광해군의 패륜을 단죄키위해 김자점, 심기원, 이귀들이 주축이 되어 능양..
179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된 30세의 정약용은 당시 단순한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인었던 화성(수원화성)에 정조의 명으로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라는 명을 받고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동서양의 수많은 서적과 당대 선진적인 실학자들의 경륜을 참고하여 화성축성 개시를 1년여 앞둔 1792년 겨울 계획안을 정조(正祖)에게 올렸습니다. 이 계획안은 모두 5 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로 되어 있는데요.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으며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시설에 대한 설명입니다. ☞ 다음은 정약용 제시한 성설(城說)의 주요 내용입니다. 1. 규모 성의 둘레는 3,600보(약 4..
의빈성씨에 관한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산]에서도 결국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는군요. 정비인 효의왕후 이래 두 명의 후궁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던 정조가 그의 정인 의빈성씨에게서 나온 문효세자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는 [이산]에서도 잘 묘사되었는데요. 과연 문효세자는 죽음을 맞은 정조의 슬픔은 어느 정도였는지 실록을 통해 알려드립니다. ☞ 정조 10년(1786) 윤7월 19일(경인) - 문효 세자를 장사지내다.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餞別)하였다. 다시 홍화문 안의 악차(幄次)로 돌아와서 영여(靈輿)가 도성 밖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흑립(黑笠)과 백포 첩리(白布帖裏)를 다시 입..
드라마에서 성송연(한지민 분)이 나중에 의빈(창녕성씨)이 된다는 설정이라면 정답은 NO 입니다. * 참고로 성송연은 의빈(창녕성씨)의 본명이 아닌 드라마에서 지어낸 이름이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계속 성송연이라 칭하겠습니다. 일단 원빈(풍산홍씨)에 관해 언급했던 포스트에서 처럼 정조의 가계도를 먼저 보며 시작하겠습니다. 정비 효의왕후 청풍김씨 ( 자녀없음 ) 제1후궁 원빈 풍산홍씨 ( 자녀없음 ) => 홍국영의 누이 제2후궁 화빈 파평윤씨 - 서1녀 옹주 제3후궁 의빈 창녕성씨 - 서1남 문효세자, 서2녀 옹주 제4후궁 수빈 반남박씨 - 서2남 순조, 서3녀 숙선옹주 다시 얘기하지만 성송연이 의빈(창녕성씨)이 된다면 정조의 두번째 후궁이 아니라 세번째 후궁입니다. 또한 두번째후궁인 화빈(파평윤씨와) 밀접한 ..
태종은 즉위한 지 18년 8개월 만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세종이 장성할 때까지 나랏일을 직접 처리했는데 내정은 세종에게 일부분 일임하였으나 군권(軍權)만은 내어주질 않았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태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처남들(민씨 4형제)의 목숨까지도 제물로 삼았던 인물이지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로서 왕이 된 아들의 탄탄치 못할 것만 같은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충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배후에서 큰 공을 세운 장인인 심온과 강상인, 류정현, 윤회등의 권력남용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중 태종의 경계 대상 1호는 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었습니다. 심온은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11살의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는 등 그야..
얼마 전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숙위소(宿衛所)와 장용영(壯勇營)에 대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위(壯勇衛)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포스트는 문답식으로 꾸며봅니다. ☞ 질문 1) 무과를 통해 2,000명의 대규모 인원을 선발한 이유는? 정조는 1785년(정조 9년)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보이던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에서 무려 2,000명을 합격시킵니다. 이는 장헌세자를 추모한다는 뜻도 있겠지마는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함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듬해 2월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난..
대역죄(大逆罪)를 범한 자에게 행하였던 최고의 극형은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陵遲]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사형으로서 대개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포를 뜨듯 살점을 베어내되, 한꺼번에 많이 베어내서 출혈과다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형벌로 능지처사(陵遲處死)라고도 불립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사육신 등을 능지처참하고 효수(梟首)하여 3일 동안 백성들에게 공개하게 한 기록이 있으며 광해군 때 홍길동을 쓴 허균도 모반죄로 능지처참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은 간혹 거열형(車裂刑..
일반적으로 음료수를 포함해서 맥주 또한 냉장고 문 쪽 음료수 칸에 넣어 보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맥주를 보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여닫는 문쪽 칸에 보관하면 맥주병이 그만큼 자주 흔들리게 되고 맛은 점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맥주는 냉장고 안쪽에 보관하세요.
새벽 무렵은 연료의 팽창이 가장 적은 때로 가급적이면 아침 일찍 주유하는 게 리터당 몇 원 싼 주유소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휘발유는 온도가 상승하면 용적이 늘어나고 온도가 내려가면 용적이 줄어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나 눈이 내려 습도가 높은 날은 주유를 피하는 게 좋은데요. 이유는 연료탱크 안에 물방울이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회 주유량이 연료탱크의 3분의 2 정도가 적당것은 연료를 가득 채우면 그 무게만큼 기름 소모량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왕이 쓰던 물건이나 글씨)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조 때부터 세를 키워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와 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또한,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 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규장각은 정조가 구상하던 개혁정치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는 거대해졌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론세력이 궐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터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이던 규장각에 자신만의 세력을 배치하기엔 그가 처해있던 상황으로는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
얼마전 화빈이 정조의 세번째 후궁이 아닌 사실은 화빈 윤씨에 관한 글을 통해 드라마 [이산]의 시간적 오류를 바로 잡은 바 있는데요. 5/20 방영분에서는 아예 화빈과 송연이(후에 의빈성씨)의 출산일을 같은날로 묘사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물론 드라마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겠지만 두 사람 다 실제 인물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설정은 자칫 사극의 특수성으로 인해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어 두사람의 출산일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화빈 파평 윤씨는 정조 4년에 두번째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며 이듬해(정조 5년) 딸을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옹주가 일찍 죽은 이후로는 소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소생이 일찍 죽어 왕실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는 이름이 오르지 못한 화빈은 순조 24년 1월 ..